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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경계에서 만난 인연

김미선♥박상일 부부의 탈북 이야기 동지애 느끼며 재혼 후 함께 압록강 건너 탈북 한수미l승인2019.05.24 17:58l(12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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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54)·박상일(52) 씨는 재혼부부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이다. 한 동네 이웃이었던 부부는 서로 다른 이유로 북한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박상일 씨는 10년, 김미선 씨는 2년 동안 말로 다 못할 끔찍한 교도소 생활을 했다.

출소 후 서로를 의지하게 된 두 사람은 재혼과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목숨을 건 탈북이었다. 두 손 꼭 잡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지난달 도착했다. 먼저 온 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 김미선·박상일 부부는 상상하지 못했던 꿈만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단다.

탈북 돕다 10년형 선고
박상일 씨는 낮에는 태권도 사범으로, 밤에는 배고파서 못살겠다는 사람들을 도와 압록강을 몰래 건너게 해주는 일을 했다. 그는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본과 중국, 한국으로 보냈다.

그러다 적발돼 10년 형을 선고받았다.김미선 씨의 남편은 군인이었다. 꽤 높은 직급이었지만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생계의 어려움에 직면하며 두 딸을 먼저 한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종종 불법전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다 탈북으로 서로의 생사를 모르던 모자(母子)의 소식을 이어 준 일이 적발돼 2년 형을 받았다.

“쥐라도 먹어야 살았다”
교도소 생활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175kg에 70kg의 체구였던 박상일 씨가 37kg까지 살이 빠져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하루에 주는 것이라곤 주먹보다도 작은 밥 한 덩이뿐이었다. 하지만 노역으로 광산에서 곡괭이질을 해야만 했고, 하루 생산량이 나오지 않을 때는 10시간이고 16시간이고 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박 씨는 “쥐는 물론 벌레며 버려진 쓰레기, 썩은 음식, 나무껍질, 풀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겐 음식이었다”고 말했다.

김미선 씨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쓰레기장을 ‘달러상점’이라고 불렀다. 버려진 깡통조차 그들에겐 백화점의 물건과 같았기 때문이다. 몰래 주워와 닦고 닦아 면회온 사람들이 가져 온 강냉이가루와 바꿔 먹었다. 다리가 아파 외부 작업을 못나간 그를 불쌍히 여겨 사람들이 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건 낸 이름 모를 풀 한 줌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
박상일 씨는 결국 죽기로 결심했다. 하루 한 번 주는 밥을 3일에 걸쳐 모아 소금 1kg과 바꿨다. 북한에서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염장무를 훔쳐 먹다 염독에 걸려 죽는 일이 빈번했기에 염독으로 스스로 숨을 끊고자, 모두가 잠든 시간에 소금을 먹기 시작했다.

소금을 먹어도 속에서 녹질 않았다. 겨우 욱여 넣은 소금으로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전신이 마비되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일주일 만에 깨어난 그는 “구척(약 270cm)키의 흰 수염이 난 아바이가 ‘너 죽으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려고 하냐’며 호통쳤다”면서 “그 환영을 보고 난 뒤 다시는 죽을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말했다.

“무조건 살아서 한국으로 넘어가 북한의 인권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거죠.”

“데리고 오지 못한 딸”
김미선 씨가 먼저 출소한 다음 박상일 씨가 동네로 찾아왔다.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지애를 나눴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이유로 한국에 가야 할 목적이 분명했다. 탈북을 결심한 박상일 씨는 딸과 아들, 그리고 김미선 씨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늦은 밤 압록강을 맨 몸으로 건너면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그때 박 씨가 남아 상황을 정리하겠다고 했으나, 길을 모르는 일행들이 겁을 냈고 박 씨의 딸이 결국 남게 됐다. 보름 후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현재 그의 딸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박 씨는 “딸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겨우 압록강을 건넜지만 끝이 아니었다. 가파른 산을 겨우 오르고, 또 브로커들과 엇갈려 눈이 오는 추운 날씨에 불하나 지피지 못한 채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중간에 중국인에게 붙잡혀, 공안으로 끌고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갖고 있는 돈의 절반 이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오로지 한국에 오겠다는 결심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눈물로 상봉한 두 딸

한국에는 먼저 탈북한 김미선 씨의 두 딸이 있었다. 그 중 당진에 살고 있는 백이은 씨는 영화에서 고문 장면을 볼 때면 엄마가 생각났다고 눈물을 훔쳤다. 그는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 가장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속을 태우다가 8년 만에 모녀(母女)는 눈물 속에 극적으로 상봉했다.

한편 딸 백이은 씨는 엄마의 재혼을 반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봐 온 이웃 아저씨 박상일 씨였지만 아버지로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단다. 백 씨는 “당시엔 엄마를 위해 반대한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사실은 나를 생각한 것이었다”며 “그때 엄마와 아빠에게 많은 상처를 줬다”고 말했다. 덧붙여 “남편(최상민)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다”며 “아직도 온전한 가족이 되기 위한 과정에 있지만, 엄마와 아빠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아내는 내 행복”

이처럼 이 부부는 이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박상일 씨는 “아내는 나보다도 더 큰 존재”라고 말했다. 출소 후 쇠약해진 건강으로 이웃들이 모두 김미선 씨가 죽을 거라고 했지만 박상일 씨는 그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또 한국에 온 지금도 통증으로 잠 못자는 아내를 위해 꼬박 1시간 동안 다리를 주무른다. 잠든 아내를 봐야만 잠이 온다고. 혹여 아내가 먼저 아침식사를 준비할까 걱정돼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는 그는 “내가 살 수 있도록, 그리고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 아내”라고 말했다. 박상일 씨의 말을 들으며 한참 눈물을 흘린 김미선 씨는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겠다”며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제가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한국은 일하는 만큼 제가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적은 돈이라도 벌어서 아내에게 주고, 아내에게 하루하루 용돈을 받으며 살고 싶어요. 저녁엔 그날 하루 있던 이야기를 나누고 또 다음날은 어떻게 살 지 함께 대화하면서 살고 싶어요.”

 


한수미  d9111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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