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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9.11.04 20:52
  • 호수 1279

[기고] 보고 싶은 나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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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자 해나루시민학교 학생


우리 어머니는 젊었을 때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혼자 장사를 하며 살았다. 그 후 가정 있는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쪽 4남매, 어머니 쪽 3남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나를 포함해서 3남매, 어찌 되었건 나에게는 10명의 남매가 있다. 없이 지내던 시절에 살다 보니, 다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그 시절은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고 내 주위에 그런 집이 많았다. 배고프지 말라고 남의 집 식모로, 남의 집 수양딸로 보내 그렇게 헤어져 살았다.

내가 4살 때 동생이 태어나고 또 둘째 동생이 8살에 태어나 동생을 내가 키우다시피 했다. 똥 걸레 빨아가며 키우느라 학교입학 통지서가 나와도 학교는 꿈도 못 꾸었다. 엄마가 혼자 살면서 대포집을 하던 시절 우리 아버지와 눈이 맞아 내가 생겼다고 우리 엄마는 화만 나면 나를 때렸다. 나는 그 당시 우리 엄마 화풀이 대상이었다. 나를 때리면서 네년 때문에 내 팔자가 이 모양이라며 나를 때렸다. 그렇게 그렇게 엄마의 북이 되어 살았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은 동생에게 항상 밥물을 받아 사카린을 타서 먹였던 기억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은 부모로서 책임감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식에 대한 애정도 없이 낳아 놓고 저절로 컸던 것 같다.

동생들과 깜깜한 밤에 등잔 호롱에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붓다 불이나 호되게 고생했던 일, 배가 고파 낮에 봐 두었던 참외밭 서리를 하다가 한 친구가 똥통에 빠져 참외밭 주인에게 들켜 혼났던 일들이 생각난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놀고 싶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그 시절 나에게 어린 시절 추억은 쌀 걱정, 끼니 걱정 동생들 배고프지 않게 밥 먹이는 거였다.

나는 어린 시절 힘들면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산에 나무하러 가면, 어린 나이에 무섭고 힘이 들어서 나무를 하면서도 노래를 불렀고, 엄마 아버지 없이 동생들과 셋이 살 때도 노래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나에게 아들들이 나의 전부였다. 하지만 해원이 해성이 나의 전부였던 우리 아들들마저 아빠 따라 하늘나라로 갔다. 전생에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세상은 나를 왜 이리 가혹하게 만드는지! 지금도 마음이 울적할 때 생각나는 사람은 하늘나라 간 아들들이다. 내 아들 해원아, 해성아 그곳에서 잘 지내지? 지금도 문득문득 엄마는 너희가 그립고 보고 싶구나! 엄마는 너희들이 보고 싶으면 예나 지금이나 늘 하늘을 본다. 별들을 보며 우리 아가들을 생각한단다. 어느 별이 해원일까? 어느 별이 해성일까? 하고 버릇처럼 별을 보는 습관이 생겼구나!!

한편 살면서 가장 상처받았던 말이나 행동은 글씨도 모르냐고 할 때다. 먼저 간 남편에게 가장 많이 들었고 버스 타고 내 맘대로 갈 수 없을 때도 가장 슬펐다. 그래서 내가 노년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은 학교다.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고부터는 책을 읽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나는 해나루시민학교에 다니면서 크나큰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나는 좌절하지 않고 신나게 공부에 최선을 다하였다. 나도 글씨를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공부하고 글씨를 배우고 나니 온 세상이 환해진 것 같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 나는 무척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시화전에서 우수상도 받았다. 지금도 글쓰기에서 틀린 것이 많아도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나 신정자 자랑스럽다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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