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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5 22:01
  • 수정 2019.11.16 12:19
  • 호수 1280

당진시대 창간26주년 특집기획
봉사하는 노인
“우리는 평생의 봉사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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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래(74·면천면 성상2리) 김원자(78·면천면 성하리) 씨
함께 산 지 40년, 봉사하며 함께 늙어간 세월
“다른 건 깜빡해도 봉사날 만큼은 안 잊어”

 

밑반찬 봉사를 하면서 어렵게 사는 노인들을 많이 만나요. 그럴 때 보면 그들이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요. 스스로 직접 살림 하나 해보지 않고 산 사람은 지금도 방 한 칸 못 치우고, 냄비를 다 태워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상태로 살아요.

반면 어려운 형편에 자녀들 키우느라 고생하며 산 사람들은 돈 있고 배고파도 자장면 하나 시켜 먹질 못해요. 그렇게 살아왔으니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살더라고요. 저희도 그래요. 봉사하며 살았으니 나이 들어서도 봉사하며 사는 거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진한 것이 박광래 씨와 김원자 씨의 인연이다. 서로 알고 지낸 지 50여 년, 함께 산 지 40여 년, 그리고 함께 봉사에 나선 지 30여 년이다. 4살 아우 박광래 씨가 봉사를 주도하면 형님 김원자 씨는 뒤에서 묵묵히 받쳐준다. “혼자였으면 지금까지 봉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 둘은 ‘평생의 봉사지기’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였지”
박 씨와 김 씨는 면천읍성을 사이에 두고 윗 동네인 성상2리와 아랫동네인 성하리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뉘집 딸’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던 사이였다. 박 씨는 “어렸을 때만 해도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면천읍성 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식당 김가면옥의 뒤편에는 4개의 방으로 쪼개진 옛 건물이 있었단다. 47년 전, 27세의 나이었던 박광래 씨는 그 곳에서 당시 코스모스 양품점을 운영했고 옆에는 김원자 씨가 친오빠와 함께 가발과 눈썹을 만들던 작은 공장을 운영했다.

오빠가 다른 도시로 떠나면서 김원자 씨의 사정이 어렵게 되자, 박 씨는 일손을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방 한 칸 내어주며 김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후 양품점과 공장 자리를 허물고 지금의 보금자리를 지었으며, 지금까지 둘은 함께 살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양품점과 가발가게

20여 년 가까이 운영한 양품점을 그만두면서 둘은 본격적으로 봉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자원활동봉사회였다. 자원활동봉사회는 1991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밑반찬 봉사단이다.

현재 당진시 박종희 자치행정국장이 계장(팀장)이고 이준기 순성면 부면장이 주무관일 당시, 이준기 부면장의 집에서 도시락을 만드는 것부터 봉사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도시락 혹은 밑반찬 봉사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밑반찬을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면 오히려 경계할 정도였다고. 차츰 밑반찬 봉사가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당진시에서 일부 식재료비를 지원했으며 160여 명에게 밑반찬을 전달했을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했다.

이 둘은 자원활동봉사회가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고 김원자 씨가 2대 회장을, 박광래 씨가 3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박 씨는 “처음 봉사할 때는 두근거리고 설렜다”며 “봉사 교육만 들으러 가도 귀를 쫑긋 세우며 감동할 정도로 즐거웠다”고 말했다.

아우가 협상하면 형님이 배송
둘은 남다른 봉사호흡을 보여왔다. 1년에 700만 원으로 매달 150명의 밑반찬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예산은 늘 부족했다. 그럴때면 둘은 더 열정을 지펴 봉사에 나섰다. 지나가다 무가 있는 밭이 있으면 주인을 찾아가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달라고 하는 쪽은 박 씨였다. 협상이 끝나면 김원자 씨가 그 무를 가지러 왔다.

밑반찬 봉사 외에도 자원활동봉사회는 당진여성의전당에서 교육받는 여성들을 위해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했다. 그때도 둘은 함께였다. 아이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현 들꽃어린이집이 설립될 무렵에도 김원자 씨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에 나섰다.

지금도 한 달 네 차례 봉사
바늘이 가면 실이 따르듯, 두 사람은 현재 삼웅교회(담임목사 안승현)와 맛드림 봉사단에 소속돼 각각 한 달에 두 번씩, 총 네 차례 밑반찬 봉사를 하고 있다. 밑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는 것까지 두 사람이 직접 한다.

또 주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선다. 고추가 있는데 빻아 줄 사람이 없다거나, 기름을 짜야 하는데 일손이 없다거나, 그렇게 하나 둘 사람들의 일을 돕다 보니, 되려 얻는 것이 더 많단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고춧가루를 챙겨주고 직접 짠 기름을 주곤 한다. 또 갓 수확한 농산물이며 먹거리를 챙겨 준다고.

“봉사 없는 날”
두 사람은 서로가 있었기에 더불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혼자 살았더라면 이렇게 봉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씨 역시 “함께 봉사하니 책임감이 생겨 더 재밌게 봉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이들은 “봉사하며 사는 삶을 돌이켜 보면 그래도 잘못 산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나이가 들어 몸은 불편하고, 뒤돌아서면 자꾸 깜빡깜빡 하지만 봉사하는 날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봉사하지 않는 날은 오히려 심심할 정도다. 김 씨는 “이제는 봉사하러 안 가거나 집에서 놀 때가 오히려 마음이 심란하다”며 “둘 다 노는 것은 못하니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씨 역시 “일단 하던 것은 해야 한다”며 “나이를 먹었더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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