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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기 국방전우신문 충남지사 회장
내 별명은‘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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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5년 전 당진에 왔다. 고향 홍성에서, 근무하는 서울을 오가려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당진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당진은 나에게 친숙한 도시였다.

나는 환절기 때마다 감기에 걸려 항상 힘들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다가 고향과도 가깝고 익숙했던 당진으로 오게 됐다. 이곳에 와서 지금은 당진외국인교회 목사로, 그리고 국방전우신문 충남지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 63명 중 6명만 고교 진학
1956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모습이다. 나는 홍성군 홍북면 출신으로 홍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세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학생이 나다. 당시 학급 친구들이 63명이었는데, 중학교는 단 12명만 재학했다. 당시 낙제제도가 있어 중도에 탈락을 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아 고등학교까지 진학한 학생은 불과 6명뿐이었다. 지금은 사진 속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2. ‘핵무기’, ‘수사반장’이었던 그때
서울에 있는 송곡고에서 재직할 때 모습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인데, 제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해서 남겨진 사진이다. 나는 당시 별명이 ‘핵무기’ 혹은 ‘수사반장’이었다. 종종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낼 때가 있었고, 종종 주변에서 나를 보고 “폭발력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던 중 군사 교육 당시 ‘핵무기’가 수업에 나오면서 내 별명이 됐다.

3. 아내와의 결혼
1968년도 아내(김계자)와 결혼할 때 모습이다. 결혼식을 앞두고 5일 전 어머니가 입원할 정도로 몸이 아팠다.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 식을 중단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 식장에 들어가서도 정신없었던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

4. 일찍 떠나보낸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83년도, 내 나이 4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 사진은 아버지 생전에 서울의 남산을 갔을 때 찍어 둔 사진이다. 아내와 나는 두 딸(미옥·민정)과 아들 하나(경민)를 두었다. 세월이 흘러 벌써 큰딸 나이가 벌써 52세다.

5. 자연농원 앞에서
나는 취미로 오토바이를 탔다. 홍성에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13명이 모여 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사진 속에서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나다. 젊은 내가 리더 역할을 맡았다. 사진은 지금의 에버랜드가 막 생길 무렵인데, 그때는 ‘자연농원’으로 불렸다.

6. 뒤늦은 신학 공부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학 공부는 늦게 했다. 신학대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고려대 경제과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송곡고에서 재학할 무렵 이유 없이 살이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 여러 병원을 가도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가족들과 기도원을 다녀오고 나서는 말끔히 치유됐다. 그 후 결단을 내려 36세에 신학대를 거쳐 대학원까지 수료했다. 이 사진은 대학원을 수료하며 찍은 사진이다.
현재 당진외국인교회에서 목사로 신앙활동을 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신앙활동을 도와 선교사를 양성해 자국에 돌아가 복음을 양성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 김무기 국방전우신문 충남지사 회장은?

1944년 홍성군 홍북면 출생
홍북초, 홍성중, 홍성고 졸업
고려대 경제과, 협성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원 수료
송곡고 재직
현 당진외국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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