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구 군청 옆 〈춘원다방〉을 기억하시나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진 원도심 이야기] 손인교 전 당진새마을금고 이사장

<편집자주>
지난해 당진문화재단에서는 원도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당진 원도심 이야기>를 발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원도심에 대해 당시 사진과 함께 지역의 원로 4명을 인터뷰해 구술을 채록한 사업이다. 누군가의 인생은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책 속에 잠들어 있기엔 아쉬운 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지면에 싣는다.

정리 임아연 기자 zelkova87@hanmail.net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읍내의 기억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인 거 같아. 그때 당진에 양복집이 두어 개 밖에 없었거든, 학교를 간다고 양복을 해 입으려고 읍내에 왔었지. 그때만 해도 다 흙길이지. 그때 채운교가 없었어. 석문에서 나오려면 고대 채운리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야 했어. 시내에 나와 보니까 차도 거의 없어. 숯불로 화력을 내는 목탄차 한 대가 덜덜덜 거리면서 지나가던 게 아직도 기억나. 군청 부근만 상가들이 좀 있었지, 지금 신성아파트 부근은 다 논이었어. 논도 계단식 논 같았지. 지대가 높아서 논들이 쭈욱 이어져 있었고, 논들 사이로 사람이나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었지.”

손인교 씨는 80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석문면 삼화리에서 태어났다. 넉넉했던 집안 형편 덕에 중학교 때부터 일찍이 인천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홍익대학 법과를 다니던 중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졸업 이후에도 언론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다 6.25 한국전쟁이 벌어져 고향 당진으로 내려오게 됐다.

고향에 내려온 손인교 씨는 석문면 장항리에 위치한 염전 관리를 말았다. 대학시절부터 언론인 생활을 하며 김구 선생을 존경해왔던 손인교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정변 이후 민주화운동을 하며 줄곧 야당에 몸담았다.

“그 시절 당진은 무서운 곳이었어.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며 이승만 물리가라고 소리 지르고 다니니까 툭 하면 경찰에 잡혀갔지. (중략) 당진경찰서에 나를 사찰하느라고 매일 따라다니던 경찰도 하나 있었어. 하도 불어 다니다 보니까 나중엔 서로 인간적인 정도 쌓여서 초상집 가서 내가 낼 돈이 없는 걸 알고 대신 봉투도 내주고 그랬어. 나도 나중에 그 사람 집 장만할 때 도움도 줬고…. 그땐 그런 시절이었어.”

손 씨는 석문면장을 그만둔 뒤 부친이 내어준 논 6마지기를 팔아 <춘원다방>을 샀다. 당진성당 진입로 모퉁이에 위치했던 춘원다방은 독재정권 시절 야당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손인교 씨는 군사독재정권 당시 故 이명남(당진장로교회) 원로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열중했다.

손인교 씨는 지역에서 많은 이들에게 당진새마을금고 전 이사장으로 기억된다. 새마을금고를 처음 설립하고 20년 간 이끌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춘원다방 한쪽에 가벽을 치고 새마을금고 사무실을 차렸다. 당진신도새마을금고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에 춘원다방을 팔고 사무실을 시장 안에 2층집을 얻어서 옮겼지. 그러다 옛 소방대 자리에 건물을 지었고. 새마을금고 초장기에는 합덕이 당진보다 더 컸어. 당진읍내에는 은행이라곤 농협하고 일반은행 하나 정도밖에 없었지, 보증인만 있으면 누구든 대출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시장이랑 원도심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어. 이용객 중에 다방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인터뷰 우현선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