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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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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어느날, 점심 때부터 흐려져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저녁 무렵에는 제법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식사 후 모처럼 뉴스에다 연속극까지 보고 나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11시의 밤하늘에는 듬성듬성 별이 보이고 달덩이마저 둥그렇게 떠올랐다.
방금전 TV에서 술병 기울이던 모습이 화근인가. 한잔 생각 간절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더구나 가을바람에 샤악거리는 솥밭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은 휘엉청하고 산아래 계곡 물소리가 가슴을 저리는데 결국 술은 동나고 시험공부하던 큰애만 슈퍼 심부름에 입이 부었다.
9층 꼭대기에서 발아래 펼쳐진 솔밭에다 달을 쳐다보며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이태백이가 내 팔자보다 더 나으랴. 참말로 집터 한번 잘 잡았다. 그렇게 그날밤은 깊어갔다.
늦잠에 부스스 눈뜨고 깔깔한 입, 아픈 속을 달래면서 무거운 몸을 버스에 싣고 읍내로 들어가는 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온 들판의 벼포기가 모두 쓰러져 누웠다. 논둑에 멍하니 서 있는 아저씨의 원망어린 표정이 차창 유리를 뚫고 들어온다.
지난밤 마신 것이 울컥하고 뒤통수가 화끈거린다. 남의 일년농사 논바닥 시궁에 엎드려 잠길 때 달 쳐다보며 시냇물 소리에 오늘 술맛 죽인다고 무드 잡았으니 웃는 모퉁이에서 통곡이 어찌 들렸으랴. 입만 실룩거리지 말도 안나온다.
IMF, 구제역 파동 다 겪어도 잘되는 장사속에 하루 번돈 셈하다가 졸려서 쓰러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깡통 차게 된 사람이 몇배 더 많다. 진급되고 당선되고 합격, 선출되어 희희낙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인맥, 실력, 모든 정력을 다 쏟아 붓고도 아주 잘못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설치면 안된다. 부럽게 바라보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해야 한다. 한때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의 너무나도 초췌해진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본다. 특히 어깨에 힘주던 사람이 그 힘이 다 되었을 때는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다.
운동장 한켠의 그네는 앞으로 나가면 반드시 그만큼 뒤로 나간다. 절대로 중간에 서질 못한다. 언젠가는 반대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세상이다. 최고로 행복할 때 불행은 바로 옆에서 쳐다보고 있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습관은 매우 훌륭한 처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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