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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박수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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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칸 집, 권세와 영화 다 어디가고

박수규 할아버지

아흔아홉칸 집, 권세와 영화 다 어디가고
일제징용과 전쟁이 인생항로 바꿔놨지

양반은 가세가 기울어도 양반이다. 비를 맞아도 뛰지않고, 추워도 곁 불을 쬘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로 이런 양반기질로 어렵사리 오늘까지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합덕읍에서 단칸방에 세들고 사시면서 슬하에 혈육 한점 두지 못하고 거택보호자란 이름으로 외롭게 날을 보내고 있는 박수규(77세) 할아버지의 지난 삶을 엮어본다.
박수규 할아버지의 고향은 대구의 동촌이며 조부되시는 박선주씨는 한말에 남해의 현감을 지냈다. 아흔아홉칸의 큰집에서 노복을 몇십명씩 거느리고 권세와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을때 일본에게 이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했다. 현감자리에서 내몰려 고향 대구로 올라와 나라 잃음에 비통하고 억울한 분통을 토해낼 곳이 없어 술로 세월을 허비하게 되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 갔다.
그럼에도 양반의 체통을 지키며 살아갈 쯤 박수규 노인이 9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의 엄격한 배일사상에 떠밀리어 국민학교도 4학년에서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이럴즈음 풍지박산으로 가세는 몰락되었고 박수규씨는 17세의 어린나이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일본인들이 사상이 불순한 집 아들이라고 낙인을 찍어 어린나이에 징발된 것이다.
“강에 떠 있는 저 달은 둥글다가 이지러지고 뜰 앞에 매화는 피고 지나니
봄이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몸홀로 타향에 올라 고향을 바라본다”
중종때 임억령의 시이다.
박수규씨는 일본 큐슈에 있는 명치탄광으로 끌려가 광부로 모진 압박을 받아야했다. 나라없는 수모와 왜 일본을 위해 지옥같은 땅굴에서 징용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아래 노동을 하느냐는 반항심이 폭발했다.
드디어 철통같은 감시망을 피해 개구멍을 통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탄광을 탈출한 박수규씨는 도쿄 근처 공사판에서 하청을 맡아 십장노릇을 하고 있는 큰형님 있는 곳으로 가서 3년동안 큰 고생없이 지냈다. 그후 광복이 되어 고국으로 건너왔으나 가난한 삶에 지쳐 고향을 떠나 전전긍긍하면서 세상구경을 하고 다녔다.
6.25동란이 휴전으로 바뀌자 대구 서문시장에 작은 규모로 직물상을 열었다. 이때 결혼을 하였으나 부인이 2년 함께 살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가게문도 닫아버렸다.
그후 다시 전라도, 경상도등 젊음을 밑천삼아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의 날품팔이로 세월을 좀먹으며 인생을 낭비했다고 박수규 노인은 말한다.
이럴쯤 전국에서 가장 큰 토목공사가 벌어진 예당수리조합의 물막이 공사에 막노동꾼으로 함께 끼어들었다. 4년여 동안 공사판에서 일하는 동안 충청도 인심좋음에 반하여 여기서 눌러살기로 작정, 합덕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50세 때의 일이다.
합덕에 와서는 도축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만 하여도 재래식으로 도축장이 운영되었으므로 모두가 손으로 작업을 했다. 그래서 박수규씨는 도축일을 할 줄 몰라 하루종일 도르레가 달린 우물에서 물 퍼올리는 일을 했다.
이때 뒤늦게 재취를 하여 가정을 꾸려 살았는데 사람이 사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그때 깨달았노라고 말씀을 한다. 지금의 단칸방에서 10년동안 함께 살았는데 위궤양이 만성이 되어 그 부인마저 저승으로 가고야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늙고 기력이 없어 밖에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거택보호자로 정부의 양곡으로 연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큰 병이 없어 누워 있지는 않지만 금년들어 방세를 5만원으로 올려받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할 형편도 못되고 사글세 내기가 벅차다고 한숨을 내쉰다.
“아직은 큰 불편없이 살면서 속옷이나 겉옷을 손수 빨아입지만 이불빨래가 문제”라고 하시면서 “홋청은 내 손으로 빨수 있는
데 바느질이 문제”라고 더러워진 이불에 신경을 쓰고 계신다. 그러고 보니 혼자 살고계시는 노인네 치고는 옷이나 방이 깔끔
하게 정돈이 되어 있다.

어느 나라에나 높은 빌딩이 있는가 하면 그 뒤안길에는 슬럼가가 있어 한끼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방랑하는 가련한 사람들
이 있다.
그동안 10여명의 혼자사는 노인들을 취재하며 느낀 것은 먹을것, 입을 것, 또 돈이 없어 실의의 빠져 사는 노인이 한분도 없
다는 것이다. 다만 슬하에 혈육이 없어 아쉽고, 사람과의 단절로 인한 외로움이 너무도 깊을 뿐이다.
우리모두가 말뿐인 이웃돕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 노인들과 단 몇분이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할애한다면 더 맑고 밝은 세상이 되리라고 생각해 본다.

서금구/당진시대객원기자
합덕대건노인대학장
(0457)363-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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