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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맷돌포구 8 아이 업고, 머리에 생선 이고 피난민 이입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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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분 할머니는 피난민 1세대로 매산리에서 60년 넘게 살고 있다. 피난 직후부터 맷돌포구와 깔판포구를 중심으로 맨손어업과 다라(대야) 장사를 이어왔다.

“스물한 살에 내려와서 첫해는 그냥 굴 쪼아다 팔아먹고, 바지락 긁어다 먹고, 스물두 살 때부터 임장사를 한 거야. 이고 다닌다고 그거를 임장사라고 그래. 거이(게) 한 다라를 담아 이고서 아이 업고, 신평, 합덕, 면천, 틀모시(기지시리)를 걸어 댕겼어. 장마다 한 달 육장을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녔어. 나중에는 당진, 운산, 서산까지 다녔지. 거산까지 걸어 나가서 버스 갈아타고. 나중에는 차떼기도 하고 택시 불러서 천안, 온양, 조치원, 서산까지 생선을 팔러 다녔지.”

큰딸을 임신한 채 6.25 전쟁을 겪은 이입분 씨는 피난민 1세대다. 고향 황해도 옹진 가막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 씨는 1.4 후퇴 당시, 친척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당진으로 내려왔다.

이입분 할머니는 생선을 다라에 이고 마을마다 다니며 생선을 팔아 쌀로 바꾸고, 그릇으로도 바꾸었다. 젊은 아낙의 몸으로 생선 장사를 다닐 적에 겪었던 갖은 고초들을 털어놓으며 여러 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임장사’ 시절, 수작을 거는 남정네들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아이를 가진 엄마의 몸인 것을 티 내기 위해 젖가슴을 풀어헤치고 다니기도 했단다. 그렇게 곱던 새색시는 깔판 포구의 여장부로 나이 들어갔다.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우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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