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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동원상사 김기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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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대한 신앙적 신념 하나로

동원상사 김기산씨

노동에 대한 신앙적 신념 하나로

비가 오는 날이면 쉬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아 집으로 일거리를 가지고 오곤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육체적으로는 속박을 받았지만 정신과 자기의 신념만은 변함이 없음을 말해주는 이 말은 갈릴레오가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한 말이다.
금년은 무척이나 변화무쌍하였던 자연과 인륜의 해였으나 자연의 순리는 제걸음으로 앞을 향해 걷고 있으니 들에는 무르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일으키고 산에는 고운 단풍이 아름다운 옷자락을 자랑하고 뽑내고 있는 계절이다.
단풍나무는 제주도, 대둔산(충남, 전북에 걸쳐있는 산), 백양산(내장산 일대)등의 계곡과 산기슭에 군락(群落)으로 야생을 하
는 우리나라의 토종나무이다. 그래서 매년 지금쯤 휴일에는 몇십만명의 단풍나들이 인파가 내장산 골짜기를 가득 메워 장관을 이루는 자연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단풍나무는 마치 자기의 죽음을 장식하는 나무와도 같이 최후를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는 숭고한 애국열사 윤봉길 의사나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김대건 신부와 그 외 순교자들과 같은 느낌이 든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명의로서 오직 의술 하나만을 바라보고 일생을 살았으며 마지막에는 제자인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아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단풍나무가 정열적으로 붉게 타오르다 떨어져 모든 나무들의 밑거름으로 변하는 그런 모습으로!
조물주께서는 실락원(失樂園)에 대한 인간의 벌로써 남녀한쌍을 알몸으로 세상으로 쫓아냈는데 그 당시 지구는 혼동상태였고 사막이나 황무지였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쉬지않고 노동을 한 댓가로 오늘날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기위해 수억년의 세월과 수억만명의 사람의 손길이 스쳐 지나갔으리라.
합덕읍 운산리 동원상사(새마을벽돌공장) 사장 김기산(66세)씨. 김기산씨는 합덕읍 성동 태생으로 신리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가난한 집안이라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돈벌이로 팔도강산을 돌고돌다 황해도 사리원의 과수원에서 품팔이를 하게된다. 인심좋고 과수원들이 넓어 일할 꺼리가 많아 5년동안 한집에서 머물렀다.
김기산씨가 얘기는 안했지만 타향인 사리원에는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고있어 신앙적인 이유에서도 오랫동안 살았을 것이다.
김기산씨는 누대로 내려오는 천주교의 집안 이었으며 지금도 합덕리에서는 김루수(세례명)라고 해야 알아듣는 노인들이 더 많다는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조 19대 임금 숙종은 미복(평민복)차림으로 민정을 살피러 나갔다. 늦은 밤에도 불빛이 화안한 어느 집에 이르니 새끼를 꼬고 바느질을 하며 남녀노소의 가족들이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음성이 하도 맑고, 표정들이 밝고도 편안해 보여서 그 집을 살펴보니 장마비가 한번만 쏟아지면 폭삭 무너질 옴팍집이었다. 숙종은 지나가는 과객인 채 하고 물었다. “살아가기가 몹시 궁색하지 않느냐”고 . 가장인 남자가 대답하기를 “이래뵈도 빚갚으며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는데 뭣이 궁색하겠소’
이튿날 숙종은 신하를 시켜 그 집 사정을 알아보았다. 한 두해의 가난이 아닌, 수대를 물려받은 가난이 분명한 그 초가삼간집
에 살면서 어떻게 빚도 갚고 저축도 하며 살수 있는지를... 숙종의 명을 받은 신하가 이리저리 알아보니 아무 재산도 없는 집이었다. 그래서 신하가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으냐”고 묻자 “낳아주신 부모님을 뫼시니 그
것이 곧 빚을 갚은 것이고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니 훗날을 위한 저축이 아닙니까”
김기산씨는 8.15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와 창말 양관(구합덕천주교회) 앞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마차를 가지고 짐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다가 농촌주택개량이 한참이던 70년대 벽돌공장에 모래를 나르는 일을 맡아서 했다. 무척이나 바빴던 시절이라고 회상하는 김기산씨는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우면 벽돌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아 그때는 모래를 마차에 가득 싣고 자기집 앞마당에 쌓아 놓았다. 모래가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놀고 있으면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당시는 손틀로 찍어내는 부럭이나 벽돌공장이라 수요에 따라가지 못함을 안 김기산씨는 벽돌틀을 몇대 구입하여 집에서 시작한 것이 20여년전의 일이었다. 지금의 벽돌에 비하면 질이 좋지 않아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팔려나가는 숫자만큼 땀방울도 늘어났던 것이다.
김기산씨는 10년쯤 지금의 공장으로 옮겨와 공장다운 규모를 갖추고 ‘동원상사 새마을벽돌공장’이란 간판을 내걸어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아들 5형제중 큰아들만 객지에서 살고 나머지 4형제는 모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외 종업원까지 13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대식구의 공장으로 커진 것이다. 더욱 질이 좋은 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4억원 이상되는 전자동 기계를 주문하여 내달중에는 새로운 제품을 KS표시품목으로 1시간당 1만장씩 생산하게 된다고 한다.
김기산씨는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서는 안되고 적극적인 참여로 최상의 신념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세상이 변화되도
록 있는 힘을 다해 노동을 해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지상의 선물을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결코 어떤 것에라도 우리마음을 집착하거나 탐을 내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으며, 오늘의 여유는 이런 일념으로 오늘까지 땀과 더불어 살아온 결과에서 얻은 과실(果實)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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