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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장전환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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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지지심으로 합덕 지켜보길 60년

장정환옹

측지지심으로 합덕 지켜보길 60년
9세때 정미장터 독립만세운동현장 목격
헌신적인 합덕일꾼 나와주길 기대

한말 권력을 손에 넣고자 세도(요새 세상을 어지럽히는 세금도둑이 아님) 싸움이 한창 벌어졌을 때의 얘기로 전해지고 있는 대원군과 명성왕후(민비)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그 두 역사적 인물이 정면으로 대립하던 때 점 잘치는 봉사 한사람이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를 명성왕후로부터 떼어놓을 필요를 느낀 대원군은 어느날 그 봉사를 납치하여 데려다가 며칠동안 아무말 않고 그저 잘먹이고 잘재우고 극진히 대접하고는 돌려보냈다. 대원군에게서 풀려난 그를 황급히 데려다 “그동안 어떤일이 있었더냐”고 묻는 명성황후에게 봉사는 있었던 그대로를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 지독한 대원군이 죽도록 미운 봉사를 국문도 않고 융숭히 대접해 그냥 돌려보내다니’ 그렇게 의심한 황후는 이미 봉사가 대원군에게 매수되었다고 판단하고는 당장 제손으로 총애하던 그 봉사를 없애버렸다.
결국 대원군은 자기손을 더럽히지 않고 명성황후에게 꾀를 보태는 봉사를 없애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겉만 보고 오복(五福)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사실은 그들중 특히 정치인이나 유지들에게 지혜와 슬기가 부족함을 볼때 실로 안타깝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 일란성 쌍생아도 1분 늦게 나와 형, 아우의 장유(長幼)의 서열이 있으나 생을 마감할 때는 순
서가 없다. 특히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과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진 때는 더욱 그렇거니와 그래서 오복중에 맨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제명대로 살다 죽음)이 끝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람은 아무리 큰재산을 가졌다하여도 죽을 때 싸가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재산이라는 것은 죽으면 집에서 작별하고, 자식들은 장지에서 고별하면 끝이고, 사람의 선행이나 덕행은 죽어서도 오래오래 함께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이 나온 것이다.
금년에도 마지막 한장의 달력이 힘없이 걸려있고 당진시대 창간 1주년의 특집으로 “합덕을 지켜온 사람”이란 부제를 달고 연
령층 별로 몇사람을 임의로 선정, 본란에 등장시켜 오늘의 합덕을 조명해 볼까한다.
85세의 장정환 옹! 합덕에서는 장회장님으로 통하는 노신사이다. 29세때에 합덕에서 살면서 57년동안 합덕의 변천과 구석구석을 보고 느꼈으며 소상히 알고있는 장정환 옹은 필자보다 꼭 20년이 연세가 높으신데 건강은 시세 애들말로 삐까삐까 한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별것없고 정직하게 그리고 재물에 탐욕없이 살았을 뿐이요”라고 하신다.
맹자의 말씀중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씀에 바탕을 깔고 평생을 남을 위하고 합덕의 발전을 위해 베풀면서 살고 계신 분이라고 인터뷰하면서 머리속에 그려본 것이다.
장정환 옹은 정미면 천의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9살때 동문수학하던 학동들과 정미장터에서 기미년 독립만세 현장을 목격했다. 착하고 순박한 우리 농민들이 일본군대들의 마구잡이 총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고만 있었지 어린나이라 어떻게 해볼것인지는 엄두도 못냈다. 어린 나이의 장정환씨는 가슴에 치솟는 뜨거운 핏덩어리를 묻어두고 성장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무지한 탓으로 일본의 식민지생활을 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늦깎이로 정미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장정환 옹은 이때 품은 뜻으로 장년이 되어 합덕에서 국민학교, 중학교의 육성회장을 20여년 동안 다했으며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합덕으로 나와살기 이전에는 당진 연초조합에서 10년을 근무하다 세무서에 근무하는 친지의 권유로 합덕양조장의 지배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29세때였다.
“몸은 악기와 같아서 좋은 가락을 연주하면 아름답게 울리고 추한 가락을 퉁기면 추하게 울리기 마련이다.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소극적인 삶의 태도와 적극적인 삶의 양식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다”(법정스님의 법어).
6.25사변후 양조장을 아주 인수한 장정환 옹은 혼자의 힘으로 부족하여 장대환, 정상윤씨와 함께 합자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사업을 하게 되었다.
“막걸리가 보통 하루에 90말씩 팔렸다는데 요새 사람들은 논에서 일할 때도 소주나 맥주를 먹는 좋은 시절로 양조장은 문을 닫고 말었지. 나도 나이 먹어 뒷전으로 밀려났듯이 막걸리도 아주 밀려났단 말이요. 한때 합덕장날에는 장꾼이 발들여 놓을 틈도 없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하면서 아쉬워한다.
“요새 합덕에는 봉사정신이 없어요. 자기 이익에만 급급해서 합덕의 일꾼이 없다고들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헌신적으로 합덕발전에 이바지 할 구심력을 갖춘 사람이 나와주어야 해요. 그래야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꾼이 어서 나타나야지요”
이게 인생 80을 넘긴 장옹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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