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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이영의씨 합덕리 경노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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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봉사요, 봉사는 기쁨이라”

이 영 의 씨 합덕리 경노당 총무

“산다는 것은 봉사요, 봉사는 기쁨이라”
연안중학 3학년때 전쟁 나 단신 피난
합덕 제2의 고향 삼아 경노당 노인 부모 모시듯

이영의(60세)씨의 나이로는 아직 경로당 출입을 할 때도 아니며 더구나 경로당의 총무일을 맡아서 전심전력, 경로당에 몸담고 전국 경로당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으로 보사부장관 상장을 받아 손에 쥐기에는 좀 이른 나이인듯 싶다. 더구나 합덕읍의 34개 리의 새마을 협회회장의 중책을 매고 있는 사람이다.
이영의씨와 마주 앉으니 광복 50주년, 분단 50주년, 금년을 조국통일 원년으로 삼자고 하는 대통령 신년 년두교서가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나라의 이산가족의 수가 1천만명이라니 남북합쳐 7천만명의 인구중 7명의 한명 꼴로 우리안에 이산가족이 함께 슬픔을 가슴에 묻어두고 50년동안 살고 있는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중 슬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어머니는 잃어버린 아기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진주보다 아름답고 살아숨쉬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두눈을 바치고, 또 검고 윤나는 머리칼을 백발과 바꿔주고, 온몸과 가슴을 가시덩쿨에 찔리며 죽은 자기 아기의 넋이나마 만나보고자 소원하는 어머니의 정을 담은 내용이 나온다.
북쪽 땅에 남아있던 이산가족의 어버이들은 50년동안 사상과 이념을 등지고 또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간 자식들을 어떠한 형극을 겪으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죽어 간 것일까.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한이 맺히고 맺혀 눈을 감지 못하고 저승으로 떠나가셨을 그들, 그리고 그 어버이들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내려온 그 자식들은 어버이를 다시 만나 볼 일념으로 오늘 내일 기다리다가 50년을 흘러버린 우리들의 이웃, 이들이 북에 두고 온 어버이들과 같이 백발이 되고 허리가 굽고 노인들로 변한 이산가족들.
생명의 볍칙은 자연의 법칙이며, 그것은 곧 자유의 법칙인 것이다. 부모형제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이산가족이라는 새로운 낱말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 말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으나 사슬에 묶인 말은 뛰지 못하여 사슬을 끊고 달려가려고 하였지만 힘만 빠지고 세월만 지나갔던 것이다.
가까운 친구중에 평양이 고향인 사람이 있어 그를 따라 작년 추석에 임진각의 망배단을 갔었다. 어느 백발의 노신사가 북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하고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네보니 “20년동안 빠짐없이 추석날에는 고향의 북쪽하늘을 바라보면서 부모님께 인사드리지요. 생사는 모르지만 욕심으로는 살아계셨으면 합니다. 22세에 월남했는데 벌써 이렇게 늙은이가 됐지요. 꼭 70살입니다. 고향은 황해도 금천이지요” 또 눈물이 나온다. 나도 따라 눈시울을 적셨다. 나야 이산가족이 아니지만 먼저가신 부모님께 살아생전 효도 못한것에 대한 자책의 눈물이었다.
이영의씨도 이산가족중의 한사람이다. 고향은 황해도 연안. 원래 연안은 38선 이남에 속해 있어 한국의 영토였으나 6.25전쟁으로 북쪽으로 흡수된 땅이다.
이영의씨는 연안중학 3학년때 전쟁이 터져 남으로 단신 피난을 했다. 연안에서는 손꼽히는 대지주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했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곳이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생사를 확인 못하고 소문으로 공산군에게 학살당했다고 들었다.
이영의씨가 남쪽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발디딘 곳이 서산.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었으나 배워야 된다는 일념으로 서산농고에 입학을 했다. 월남할 때 많은 돈을 갖고 와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에게 돈을 맡기고 이익금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였으므로 외롭고 고달픈 피난생활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궁색을 면할 수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쫓는 자 뒤에는 또 쫓는 자가 있고, 삼잡이가 제잡이가 된다는 말도 있듯이 서산시장에 큰 불이 나서 하룻밤에 쑥밭이 되어 학비와 생활이 막연하여 인천에 가서 어렵게 직장을 구하니 미군항만사령부 식당에 취직을 하게된다. 1년 6개월간 일해 저축한 돈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산으로 내려오던중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온양고등학교로 전학하고 거기서 졸업했다. 졸업후에 대전으로 가서 경찰로 특체되어 경찰간부집의 근무병으로 근무하다가 4.19혁명이 일어나 경찰을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고 비로소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이영의씨는 개인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가마와 새끼공장을 차리게 되어 볏짚의 수급이 원활하고 소비가 많은 곳을 골라 합덕리에 공장을 차렸다. 그 공장이 인연이 되어 28년간 눌러 살게된것이 오늘의 합덕리이며 제 2고향으로 생각하며 뿌리를 깊게 박고 살고있다.
이영의씨는 고향에 남아 게시는 부모님과 형제를 생각하며 그분들을 뫼시는 뜻으로 합덕리에 92년도 노인정을 개설하는데 큰 힘을 보탰으며, 또 총무를 자청하여 맡아 서울등으로 다니면서 농산물 직거래등 합덕리 경노당과의 자매결연사업으로 분주하게 오르내렸다.(본보 46호 참조)
“산다는 것은 봉사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봉사했으며 그리고 봉사한다는 것은 큰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라는 시성 타고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합덕리 경노당의 60여명의 회원 모두가 여생을 건강하게 그리고 보람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봉사하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이영의씨는 말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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