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목련꽃 하얗게 흐드러지던 날 아내와 약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충기 당진시의용소방대연합회장 (대호지면 조금리)

한충기 당진시의용소방대연합회장 (대호지면 조금리) 

 

첫 번째 추억사진
조금초등학교 6학년 때 대호지면 사성리 바닷가로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이다. 50년이 넘었으니 갖고 있는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일 것이다. 당시 조선동 담임선생님(가운데)과 같은 반 친구인 (왼쪽부터)이동섭·정종명·손일표와 함께 찍었다. 나는 가장 오른쪽에 있다.  친구들이 사진 찍는 걸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재밌다.

두 번째 추억사진
14살 쯤 ‘마차’라 부르는 소달구지를 끌던 우리집 소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소가 어찌나 일을 잘했는지 하루 인건비가 500원 했던 시절에 이 마차를 끌고 나가 일을 하면 2500원을 받았다. 볏가마, 보릿가마 다 실어 나르고, 가을엔 무와 배추를 실어 날랐다. 이후엔 경운기가 생겨나 소달구지가 거의 다 사라졌다. 아득한 옛 풍경이다.

세 번째 추억사진
현재 당진문화스포츠센터가 있는 자리에는 원래 당진군농촌지도소(당진시농업기술센터의 전신)가 있었다. 1978년도에 가뭄이 크게 들었는데, 못자리를 살리려고 무진 애썼던 해로 기억한다. 그해 가을에 4-H구락부 경진대회가 열렸고, 모범새싹상을 받았다. 당시 함께 모범새싹상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농촌지도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면천 이정세, 송악 황성옥, 합덕 김정희, 우강 김경숙, 석문 故 이만표, 순성 안재옥, 고대 신태운 씨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가장 오른쪽에 있다.

네 번째 추억사진
대호지면 4-H구락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스무 살 무렵, 누군가의 권유가 아닌 내 스스로 4-H 선배들을 찾아가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완전히 4-H에 미쳐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참여했다. 과제활동을 해서 당진군 콩증산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4-H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기동순찰대(현 자율방범대), 새마을운동, 농업경영인회, 주민자치위원회 등에 참여해왔다. 지금은 대호지면전담의용소방대장이자 당진시의용소방대연합회장, 충남의용소방연합회 재난지원분과위원장을 함께 맡고 있다.

다섯 번째 추억사진(5~7번)
내 나이 25살, 24살이었던 아내(김명희)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 이웃에 사는 오남숙 씨가 자신의 동창인 아내와, 이웃인 나를 이어줬다. 오남숙 씨가 어느 날 장정리에 사는 아내 집에 놀러갔다가, 저녁에 집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무섭다면서 아내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오남숙 씨를 데려다 주고 그집에서 하루 묵게 된 아내를 그 다음 날 만났다. 나는 미리 언질을 들었는데, 아내는 나를 만날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 나는 4-H 활동을 하면서 장정리에서 열린 척사대회에 인사를 갔다가 아내를 본 적이 있었다. 전 부치고 막걸리 나르는 새침떼기 아가씨였는데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소개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목련이 하얗게 흐드러지던 4월에 결혼을 약속했다. 해마다 목련꽃이 피면 약혼했던 그 날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행복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옛날엔 동네 사람들이 사과, 배, 잣, 곶감, 떡 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큰상’을 차려주셨다. ‘큰상’은 일생에 환갑과 결혼 때 딱 두 번 받는 상이었고, 잔치가 끝나면 다같이 나눠먹었다. 아내 옆에는 큰처남인 김성신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 선열유족회장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내와 함께 산지 40년이 됐다. 딸 다섯(인숙·지연·유리·주연·지윤)에 아들 하나(관웅)를 낳아 기르고, 시부모를 모시면서 사회활동 하는 나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