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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20.06.16 15:04
  • 호수 1311

[칼럼] 최영기 휴스턴 이민문화연구소장
내가 살고픈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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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서해의 뱃길을 열고 수많은 봉우리를 곁에 두며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왜목마을이 거저 생긴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혜의 자연환경을 수백 년에 걸쳐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이를 파괴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몰염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들만 살고 떠날 땅이 아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꽃이 피면 반드시 시들기 마련이다. 중국의 철학자가 쓴 <아침 꽃 저녁에 줍다>란 책에서 등장하는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짧은 운명을 지녔다.

온갖 자태를 뿜어내며 세상을 향해 겨우 하루 동안 피었다가 또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한낱 꽃보다 못한 사람들이 고향을 대표한다는 미명 아래 지금 당진의 소중한 사람들과 대지는 몸살을 앓고 있다. 결국 우리의 자녀들에게 오염되고 치명적인 미래를 떠넘기는 꼴이 될 것이다.

지난해 전국을 들썩였던 ‘라돈사태’가 겨우 잊힐 듯하더니, 이번엔 메가톤급의 산업폐기물처리장이 골칫거리로 등장했다는 소식을 태평양 건너 해외에서 접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게 있어 당진은 지난 수십 년간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은퇴 후 고국으로 돌아가 제2의 삶을 예비할 곳이다.

그 땅은 ‘상록수’를 꿈꾸었던 심훈 선생이 있어 좋았고, 성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곳이라 종교적으로도 남다른 믿음의 뿌리가 있다. 해서 몇 해 전 송악읍 반촌리에 머무는 동안 ‘반촌(泮村)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유인 즉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은 시골 사람, 나머지 반은 도시 사람으로 살아가고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1980년 민주화 바람이 불어오던 시절 대학 캠퍼스에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1990년 말 IMF를 끝으로 한국을 떠나 힘든 이민 생활 시작했고 그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이제 막 고향으로 돌아가고플 때 불거진 산폐장 건립 뉴스는 어쩌면 내게 이곳으로 오지 말라는 표지판 같아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사람이 보여야 마을이라 했는데 완공 후 전국에서 모여들 이름 모를 폐기물로 쌓여가는 당진을 예상하면 앞으로도 자신있게 내가 살고 싶은 고향이라 말할 자신이 점차 사라져갈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양심은 어디에 있을까?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지금 이 순간도 밤잠을 설치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지만 몇 대 이어온 터줏대감 못지않게 당진을 사랑하기에 산폐장건립반대대책위에서 애쓰는 친구가 있다. 나는 오늘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장차 나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될 지금의 당진을 보며 ‘옛고향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간데없고 휑한 바람과 함께 코끝을 스치는 쾌쾌한 내음이 미간이 지푸려지고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발길이 돌려지고 있다’라는 말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향은 분명 고향인데, 사람은 사라지고 오염된 욕심만 남을 마을이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바라건대 사랑하는 고향을 제발 좀 잘 지켜주길 바란다. 미세먼지, 공장 매연, 산업폐기물, 라돈에서 모두들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만 힘을 내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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