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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3-18 11:4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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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진승현 전 호서고 음악교사
가난 속에도 식지 않은 배움의 열정
제자들에게도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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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고 설립 당시 부임…음악교사로 근무하며 밴드부 지휘
매년 스승의 날 제자들이 찾아오고 제주로 여행 보내주기도

지난 11일 졸업한 지 30여 년이 넘어 환갑에 이른 제자들이 스승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스승 덕에 지난 힘든 세월을 버틸 수 있었노라고. 가슴에 안고 살아온 스승의 온정을 제자들은 잊지 않았다. 서로 만나 헤어지는 순간까지 마음을 나눴다.

진승현 전 호서고 음악교사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그는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 하나로 버텨냈다. 그렇게 교사가 되고 자신과 같이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볼 적마다 뒤에서 조용히 손길을 내밀었다. 그 온기가 퇴임 후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집 둘째 아들

진승현 교사(82)는 호서고등학교가 처음 설립된 지난 1975년 부임했다. 그 해 2월 25일, 종업식 때 학생들을 처음 만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한 피아노 회사에서 근무했다. 평탄한 삶처럼 보이지만 고향 경남 사천에서 서울로, 그리고 당진에 오기까지 가난이 준 고난의 연속뿐이었다.

진 교사는 여덟 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에는 모두 네 식구가 살았다. 조부모와, 일찍이 세상을 떠난 큰아버지의 남은 가족, 그리고 작은아버지, 진 교사네 가족까지 14명이 함께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밥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했다. 봄이면 쑥과 나물을 캐 오고, 여름이면 콩 잎을 주워다 말려 먹었다. 그렇게 겨우 아침 끼니를 때우고 점심은 먹을 생각조차 못하고 굶었다. 강도, 저수지도 없는 그 시골, 가난 속에서 진 교사는 자랐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만 보내 달라고 조른지 4년 만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끼니조차 해결 못 하는 집안에 고등학교는 어림없었다. 항구에 서서 학교가 있는 통영으로 향하는 배만 바라보던 진 교사는 그 길로 뛰쳐나가 홀로 통영의 수산고에 입학했다.

 

홀로 뛰쳐나가 고교 진학

집에서는 보리 10되와 쌀 10되 보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학비며 생활비 전부 그가 벌어야만 했다. 학교가 끝난 저녁이면 신문을 배달하러 다녔고, 방학에는 시장에서 바늘이며 비누 등을 사 통영부터 보성, 거제, 진안, 하동, 산청, 남해 등 고을을 오가며 팔았다.

밑바닥이 헤져 발등만 겨우 걸친 신발을 신고 다니며 여름이면 짚더미에 누워 잠을 청했다. 씻지도, 옷도 갈아입지 못한 그의 몸에 벼룩이 군데군데 붙어 이로 깨물어 죽이곤 했다고. 또 겨울엔 남의 집 변소며 창고에 짚을 주워다가 깔고 자며 추위를 피했다.

눈물의 ‘합격’ 통지서

하지만 진 교사의 학업을 향한 열정은 가난 속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번 역시도 부모 몰래 경희대 음대에 입학 원서를 냈다. 잘 곳 하나 없었지만, 중학교 선생님(김용택)의 도움을 받아 장롱 짜는 공장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금호동에서 회기동까지 2시간 넘게 걸어서 시험장을 찾았다. 결과는 합격. 하지만 기뻐해야 할 통지서 앞에 진 교사의 부모는 통곡만 할 뿐이었다. 그는 “방 한가운데에 통지서를 놓고 부모님이 미안함에 우셨다”며 “그때 살림 밑천이었던 소를 팔아 겨우 등록금을 해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등록금뿐이었다. 잘 곳조차 없어 학교 연습실이며 화장실에서 쪽잠을 잤다. 책가방이 아닌 지게를 짊어지고 공사판을 전전하고, 오이며 호박을 손수레에 실어 팔기도 했다. 턱없이 부족한 생활에 아버지까지 가세해 춘천댐 공사며 외국어대학교 운동장 조성 공사판을 다녔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는 장장 10년 만에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늘 함께였던 트럼펫

그 시절 진 교사의 곁에는 트럼펫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서도 이어졌다. 배운 것이 트럼펫이기에 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호서고 음악교사로 재직했을 때에도 밴드부를 지휘했다.

호서고 밴드부를 맡으며 당시 당진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행사에는 빠짐없이 다녔다. 학생들을 데리고 각종 연주를 선보였다. 그때 받은 기념패며 공로패, 그리고 기념 깃발이 가득히 쌓여 있다. 한편 밴드부를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그는 “당시에는 학습태도가 좋지 않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밴드부 활동을 많이 했다”며 “엇나가는 아이들 잡으러 다니며 악기를 연습시키곤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종종 어려운 학생들이 있으면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번에 만난 15회 유영창 제자의 경우 진 교사의 아내(김순필)가 자신들의 자녀 3명에 더해 제자의 도시락까지 매일 싸다 전하기도 했다고. 또 가정형편이 어려운 조혁연 제자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밴드부 지도를 도왔고, 결국 특장학생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진 교사는 “나 역시 돈 없이 학교를 다니며 뼈저리게 고생했기에 한 명의 아이라도 올바르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매년 이어지는 스승 사랑

그때 전한 스승의 사랑이 아직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온다고. 제자들은 그의 환갑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진 교사와 아내 김순필 씨의 제주 여행까지 보내줬다. 그는 “70세가 넘은 제자도 있다”며 “지금도 만나면 제자들에게 ‘사람 다운 사람이 되라’고 전해준다”고 말했다. 덧붙여 “제자들이 찾아와 줄 때면 뿌듯하고 반갑다”며 그 역시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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