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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음섬포구 5
목화실로 만든 그물에 갈물 들여 새우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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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농장 방조제가 막히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음섬포구에는 어선이 많지 않았다. 구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목선 서너 척이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목선 조그만 걸 노 저어서 다니던 풍선 있잖어. 그걸로 새우잡이를 했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새우를 잡아 오면 나도 막 져나르고 그랬지. 봄에는 꽃새우, 지금은 드물지. 그때는 저 앞바다에 말 막고 그물을 맸다고.”

1960년대에 음섬포구에서 어업활동을 했던 故 김동태 씨는 매산리와 행담도 사이의 바다에 그물을 치고 젓새우를 잡았다. 당시에는 목금, 목그물이라 해서, 목화실로 만든 그물에 갈물을 먹여 사용했다. 목그물에 대한 구술은 신평면뿐만 아니라 송산면에 위치한 포구에서도 일관되게 등장한다. 

“갈이라고 있어. 큰 가마솥에다 갈을 넣고 끓여가지고 그물에 갈물칠을 해서 말려. 그래야 썩지 않더만. 그래 빳빳하니, 옛날에 광목 같은 거 풀 먹여이듯 하는 거야. 갈이란 게 열매는 아닌데 깨치면 시큼혀. 그걸 사다가 썼지. 그걸 ‘갈한다’고 그랬어. 그걸 해서 갖다 매고 사릿발 때 또 매고. 그래서 꽃새우를 잡았지. 음력 5월 이후에는 오젓, 육젓 잡으러 다니고. 그때는 선착장이란 게 있어? 그냥 판판했어. 저 새말까지 물이 들락날락할 때니까. 선창에서 지게로 져다 날랐지. 새우젓 담은 기다란 독을. 송판떼기 대고서 2개씩 묶어가지고. 그 새우젓을 아버지가 노 저어서 들로 나가 파시더라고. 그때는 이 갯고랑이 저 홍성까지 뻗쳤을껴. 구만리까정 노 저어 왔다 갔다 했으니.”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젓새우 잡이는 행담도 앞에서 이뤄졌다. 매산리에 김승환 씨의 부친을 비롯해 여섯 집 정도가 젓새우 잡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이석 씨는 음섬포구에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 사이에 풍선을 타고 꽃게를 잡았다. 자신의 첫배였던 목선을 운용한 지 2년 만에 동력선으로 교체했다. 그러다 1979년, 태풍에 전마선이 유실되는 사고를 겪은 뒤 꽃게잡이를 접었다. 그는 주로 장고항과 화성시 사이에서 꽃게, 준치 등을 잡았다고 한다.   

“도릿고리라는 바다가 있어. 그게 화성 앞, 당진 장고항 건너편이여. 거기서 꽃게를 잡았어. 꽃게를 잡으면 운반선이 와서 바다에서 바로 상회로 실어 가. 그때 준치도 잡았지. 그물이 터지도록 잡아봤어. 그때 당시엔 아산만 명물이 준치였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신평면 일대에서 조업한 어민들은 대부분 준치, 꽃게, 꽃새우, 젓새우와 더불어 다양한 어종을 잡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배를 정박하고 살던 지역은 맷돌, 음섬, 운정 등 각각이지만 조업활동을 했던 구역은 유사했다.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우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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