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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20.08.18 17:27
  • 호수 1319

[당진의 유제 군수 이야기 2] 유제는 누구인가? ①
유제 군수와 당진의 복음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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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완 당진시 기독교역사문화교육위원장 / 탑동감리교회 원로목사

유제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90년부터 1899년까지 10년뿐이다. 한 인생에 있어서 10년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지만 유제 군수가 당진(옛 면천)에 심어놓은 기독교적 가치는 실로 엄청난 영적 업적이다.

유제의 기록은 먼저 ‘승정원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본 이름은 유수(劉溲)였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그 이름을 유제(劉濟)로 개명하도록 윤허하였다.<고종 28년/1891년 9월1일>

그는 개명 당시 분교관이란 벼슬을 맡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특별시와 같은 특수 지방 관청의 종 9품의 하급 벼슬이다. 그러나 고종이 이름까지 개명하도록 윤허했다는 것은 유제가 고종에게 각별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유제는 1892년과 1893년 경 미곡을 무곡하고자 내포지역에 내려오게 된다.

유제가 중앙정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 내포지역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무곡사건을 통해 면천지역에 베푼 선행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신앙의 도리에 근거한 선한 선행인 것만은 사실이다.

유제가 내포에서 쌀을 무곡할 당시 이 지역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흉년으로 피폐해진 면천지역에서 무곡한 쌀을 무상으로 10여 고을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전 면천군수 유제는 근본 서울 사람으로 천성이 인선하고 마음이 온유한데 사오년 전에 쌀을 무곡하고저 하여 내포 등으로 갔더니 흉년을 당한 백성들이 유리함을 보고 불쌍히 여겨 수십만량 무곡한 쌀을 훗허 내포등지 십여 고을에 거민을 주었으며 갑오년 동란 때에 선유별관을 하여 또한 사람을 많이 살린지라”<조선크리스도인회보/1897년 11월 3일>

유제의 이웃사랑은 면천과 내포지역에 상당한 신뢰와 영향력을 끼쳤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연유로 유제는 1894년 갑오년 동란 때 고종의 명을 받아 선유별관(宣諭別官)으로 당진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선유별관은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 왕명에 따라 백성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임시관직으로, 당시 유제는 면천과 당진, 호서, 내포지역의 농민군의 활동이 많은 지역을 맡았다.

또한 류제는 당진 동학과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면천면 사기소리와 당진읍 구룡리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인 승전목에서 동학군 2만여 명이 토벌군과(관군) 전투를 별려 승리를 거두는 전투가 있었고, 승전목 전투에 패한 관군과 동학교도와의 관계에서 흉흉한 민심을 평정할 수습차원에서 유제가 선유별관으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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