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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24 15:25
  • 호수 1320

당진의 유제 군수 이야기 3 유제는 누구인가? ②면천군수로 임명된 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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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완 당진시 기독교역사문화교육위원장/탑동감리교회 원로목사

유제의 면천군수 임명은 독특한 면이 있다.

면천, 당진, 고덕(한내) 등의 백성들은 유제를 면천군수로 세워 줄 것을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청원했다.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내부에 청원하여 면천군수를 한 것이며 석비를 각처에 세워 유제의 은덕을 칭송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1897년 11월3일>

유제는 군수시절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 받았고, 각처에서는 석비를 세워 유제의 은덕을 칭송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 선교사는 유제의 면천 사랑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류면천’으로 명명해 부르는 정도였다. 

승정원일기에 유제는 면천군수로 임명받고, 1895년 6월 18일부터 1896년 10월 14일까지 1년 4개월 동안 면천군수로 재직했다고 쓰여있으며, 독립신문에는 유제가 1년 4개월을 끝으로 본관 면직을 당했는데 “면천군수 유제는 포구 풍속이 완우하니 잔 정사를 마땅히 경계하기로 갈렸다”고 명시돼 있다. <1896년 10월 17일> 

군수의 재직기간이 당시에는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평균 재직기간이었으므로 그가 단명한 군수만은 아니었다. 그는 해안 지역에서 실시하는 풍어제 같은 무속 풍속을 단속해 어민들의 원성을 사게 돼 면직을 당했다. 당시 내포 예당평야 중심에 흐르는 삽교천을 중심으로 여러 포구가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고, 아산만 입구의 공세곶, 우강면의 부리포, 강문포구 그리고 예당 평야의 고덕면 조곡실에 있던 유명한 구만포구는 전통적으로 풍어제 등을 통해 우상숭배를 해왔다. 

기독교 신자인 유제의 입장에서는 포구에서 행하는 각종 우상숭배와 무속행위를 보면서 그가 접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초기 기독교신자들은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결과적으로 이를 강력히 통제하려다가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결국 군수에서 면직 당하게 된 것이다. 

면천군수 면직을 당한 후 독립신문에는 충청남도 관찰사가 유제에 대해 내부에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었는데 “충청남도 관찰사가 내부에 보고하되 면천군수 유제 범포가 육천이백량이 되고 이포가 오천 일백여냥이 되어 당진군수 박용덕 씨로 별정 사관하여 사행한다 하였더라”라고 기록돼 있어 부정부패한 관리로서 평가하고 있다. <1897년 1월5일>

그가 면천군수가 되기 전의 행적과는 상반된 행적이어서 의아한 사항임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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