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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깔판포구 4
황해도에서 피난 온 이씨 일가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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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판포구에 살고 있는 이입분 씨는 첫 아이를 임신하던 해에 6.25 전쟁을 겪었다. 황해도 옹진군 가막개라는 마을에서 인천으로, 다시 연평도로 쫓겨 다니다, 21살에 당진 깔판포구에 정착했다.

첫 아이를 낳은 지 보름도 못 되어 갓난아기를 솜이불에 싸서 안고 피난길에 올랐던 이 씨의 손에 들린 건 숟가락 3개가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사촌지간이 먼저 자리를 잡은 깔판포구에 정착했고, 그 시절 풍경은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여기 깔판 주변에는 집들 몇 채 없었어. 박일남네라고 집 하나 있고, 움막집 한 두 개. 그리고는 다 산이었어. 그때 소나무가 꽉 들어찼었지. 처음에는 빕시기에서 남의 곁방에 살다 움막을 짓고 깔판으로 왔지.”

이입분 씨와 육촌지간인 이강선 씨도 깔판포구에 거주하는 피난민 세대다. 그는 황해도에서 어업에 종사했던 부모님(부 이기화, 모 박혜월)을 따라 우강면 부리포로 피난온 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친척들이 모여 사는 깔판포구로 이사를 왔다.

“오촌, 사촌고모, 형제들이 다 같이 아버님 배를 타고 부리포에 내려왔어. 처음에 배에서 살다가 동네 사람들이 집을 내줘서 우강에서 좀 살았지. 그러다 그때 여기가 고기가 엄청 났었거든. 아버지가 배를 하시니까 깔판으로 내려오게 된 거지. 여기가 모두 소나무 밭이었어. 움막을 짓고 살았지. 아버지가 배로 고기 잡아 오시면 여자(어른)들이 이고 나가서 팔고. 그땐 다 곡식으로 바꿔다 겨우 연명해가며 살았던 거지.” (이강선)

이강선의 아내 김홍난 씨는 “시부모님들한테 듣기로는 그때 여기에 살 집이 없어서 움막을 치고 살았는데 집안네가 다 같이 와서 모여 살았다”며 “박일남 씨가 새우를 잡아서 가마리에 새우를 말려서 안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깔판이라고 불렀는데, 그때 그 집 말고 다른 집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우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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