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1960년대 신평어촌계의 중심이었던 깔판포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깔판포구 5

“그땐 깔판포구 규모가 더 컸지. 포구는 없었어도 배들이 그쪽으로 많이 돌았어. 다른 데는 뻘인데 깔판은 모래사장이라 배를 대 놔도 가만히 있잖어.” (노이석) 

인근 포구 어디에도 어선을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 천연 모래해변이 조성돼 있던 깔판은 자연스레 어선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어선 대다수는 맷돌포구와 깔판포구에 걸쳐 어선을 정박했고, 그 앞바다에서 조업 활동을 했다.

매산리와 부수리에 거주하는 구술자들은 1960년대 어업 활동을 구술하면서 세 포구(맷돌, 음섬, 깔판)를 구별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성향이 공통되게 나타났다. 이는 현재도 당진의 다른 어촌계와 신평어촌계가 구분되는 특징이다. 대다수의 어촌계들이 마을 단위로 형성돼 있는 것에 비해 신평어촌계는 여러 개의 마을 어민회가 모여 하나의 어촌계를 이루고 있다. 

“신평어촌계는 4개의 포구가 합해진 거지. 다른 데는 어촌계가 다 (하나의) 자연부락이잖아. 근데 여기는 운정리, 부수리, 매산리 또 도성리 일부까지 4개 마을 포구들이 합쳐졌지. 이장은 4명인데 어촌계는 하나밖에 없어. 여기는 이렇게 구성돼 있어.” (손기호)

신평어촌계에는 음섬어민회, 깔판어민회, 삽교천어민회, 맷돌포어민회와 함께 2010년 조직된 삽교호운정내수면어업계가 속해 있다. (2017년 9월 기준) 2017년 당시 162명에 달하던 신평면어촌계 계원수는 97명으로 줄었다. (2019년 6월 기준)

손기호 어촌계장은 “어촌계원으로 등록돼 있으나 고령으로 실제 어업 활동을 하기 어려운 분들, 지역을 떠난 분들을 정리하니 절반으로 줄었다”며 “신평어촌계는 당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우현선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