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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20.10.19 12:10
  • 호수 1327

[기고] 정병수 상개중앙교회 원로목사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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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숲의 기지개, 그 생명의 들숨 날숨, 파릇파릇 피어나는 봄 숲의 가녀린 손짓은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며, 고요하나 경쾌한 리듬이고, 때 묻지 않은 한 편의 시다. 저녁 잠자리, 찬란한 신록, 그 고요한 숲은 어느새 나를 숲속으로 데려간다.

아, 예쁘다. 깨끗하다. 고결하다. 투명한 연두빛 신록이어라. 피천득은 <오월>에서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고 노래했다.

가을 산, 형형색색의 단풍은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청아한 산을 느끼려면 봄에, 예쁜 산을 보려면 가을이 제격이다. 낙엽이 우수수 쌓인 늦가을 산은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맨몸과 빈손의 스승 앞에서 그 누가 욕망의 노예로 울그락붉으락 할 것이며, 자만이 무릎 꿇지 않겠는가. 착해지려면 봄날 산에 오르고, 사람이 되려면 가을 산에 오를지라.

하지만 산의 백미는 겨울 산이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느껴보라. 만산을 하얗게 뒤덮은 백의의 천사를 만나보라. 무심코 서서 팔 벌려 눈 맞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라.

꽃보다 결코 덜 예쁘지 않은 눈꽃이나 모진 칼바람 타고 영근 올곧은 의지의 자아확립, 겨우 기댄 앙상한 가지보다 더 강인한 완숙(完熟)의 일렬횡대(一列橫隊) 상고대, 이만한 얼음 예술을 본 적이 있는가? 온통 잿빛 하늘 아래 무릎까지 덮이는 길 없는 길, 새하얀 흰 눈더미 위에 새길을 내며 걸어보라. 영화의 한 장면도, 이 세상도 아닌 환상의 별천지를 보리라.

볼을 에듯 매서운, 능선 칼바람에게 손찌검을 당해보라. 혹독한 추위에도 속옷을 걷어 올리고 온몸의 땀을 닦아보라. 얼어 터질듯한 손을 호호 불며 눈 위에 선 채 도시락을 들어보라. 삶은 도전이요 전진이며, 견딤이요 이겨냄이라는 걸 터득할 것이다.

또한 이마에 땀을 훔쳐내 후텁지근한 여름 산을 아는가? 삼복더위를 한층 더 덥게 하는 진한 녹음은 내게 더위를 만끽(滿喫)하게 하며 강렬한 삶의 에너지를 뿜어주었다. 이 진한 여름 숲을 걸을 때 나는 산의 정기, 숲이 지닌 충만한 생명의 숨결이 내 몸으로 스며듦을 느낄 수 있었다.

땀을 쏟으며 헉헉거리는 내 숨결에서 더위와 맞서는 나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느꼈다. 쏟는 땀에 나의 가슴을 열어 물 말아가며 걷고 걸었으며, 오르고 또 올랐다. 내 거친 포르테(f) 호흡은 나의 능력이요, 자신감이고 쾌감이었다. 이처럼 여름 산은 나의 살아있음이요, 에너지의 현장이었다.

여름 산은 바쁘다. 온갖 새소리로 음악회가 열리고, 들릴 듯 말듯 풀벌레의 그 맑고 고운 화음은 얼마나 청아한가. 산을 뒤흔드는 소리 없는 초록의 함성, 웅장한 관현악을 들어보았는가? 하루살이와 온갖 날벌레, 하찮은 벌레까지 그리 분주한지….

내 산행의 첫사랑 여름 산에서 나는 삶을 배운다. 왜 산에 가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냥. 참, 산이 좋으니까”하고, 뭐가 좋으냐고 물으면 “그냥”이라 답한다. 그냥이 뭐냐고 하면 “모른다고. 참, 산 냄새, 그 고요함, 언제나 믿음직하게 늘 거기 있는 게 좋다”고….

숲의 식구들은 한결같이 요령도, 꾀도 없다. 춘풍추우, 삼복더위, 엄동설한, 그 언제고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늘에 순응하는 지혜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서로 비켜, 비켜서며 함께 살아간다. 나는 보았다. 산은 더럽지 않고, 거짓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변절도 배신도 없는 것을.

사람은 하늘 위를 걸으려고 하나 산은 늘 하늘 아래서 그렇게만 지내왔다. 그것밖에 모른다. 산은 차라리 선하다고, 정직하고 진실하고 경건하다고 외치고 싶다. 산을 멀리하는 세속은 점점 황폐해지나, 산을 찾으면 정화되어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즈넉한 봄 산에 오르면 잡티를 씻어내게 되니 착하게 정화된 심성의 하늘시인 되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평안을 그려볼 것이며, 가을 산에선 예쁜 단풍색처럼 밝은 얼굴이 되고, 낙엽을 밟으며 어느새 철학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땀을 쏟는 여름 산에서는 우울한 실패를 떨치고 내일의 희망을 보면서 눌림이나 주저함 없는 도전을 시작할 것이다. 여름 산은 정(靜)이 아닌 동(動)이며, 감상이 아닌 실존적 현장이다. 그리고 눈 덮인 겨울 산은 소름 돋는 탄성이요, 세상과 나를 잊은 다 이룸이다.

산을 벗 해보니 거기 정의와 선, 진실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간 세상에 널린 불의와 악, 거짓은 없었다. 이것을 난 정의와 선,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속인은 자꾸 때를 묻힐 테지만, 욕심일까. 그래도 나는 산을 배우러 산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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