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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20.12.16 09:39
  • 호수 1334

[당진의 유제 군수 이야기 14]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방문…신앙공동체에 큰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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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완 당진시 기독교역사문화교육위원장 / 탑동감리교회 원로목사

덕산교회 공동체에 여러 박해가 있었지만 그들만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기록했듯 한참 공동체가 기초를 닦을 때 최병헌과 박한규 같은 유력한 기독교인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복음을 전했고, 1898년 5월 스크랜톤 대부인과 시란돈 선교사가 동행해 수원 및 공주구역을 순회할 때 덕산지역을 방문하였다.

1898년 미 감리회 연회록을 보면 시란돈 선교사는 “5월 두 번째 전도여행은 300~500마일을 돌았다. 나는 어머니와 동행하였다. 이 여행은 대단히 만족스러웠지만 염려되는 것도 적지 않았다. 지난 일년 동안 이 구역에서는 관청의 박해가 심하였고 이것은 신도 수의 감소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이러한 신도 수의 감소가 극히 너무 적은 교육을 받은 그들보다는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느끼고 왔다”라고 보고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덕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관청에 의한 박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정탐팀들이 이 지역을 방문했다. 김석영은 ‘처음 선교사 아펜젤러’에서 이 장면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 일행은 따뜻한 가정과 친절한 기독교인들을 서울에 두고 여행을 떠났다. 동쪽으로 충청도를 거쳐 가는 도중에 내포라는 곳을 경유했다. 아름다운 계곡과 무르익은 벼 이삭이 절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넓은 평야의 풍경을 바라보니 참으로 좋았다.

점심에는 캔에 든 닭고기와 쌀밥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식사를 좀 하려고 하면 마치 동물원에서 동물 구경을 하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밤에는 맑은 공기 속 풀밭에 놓은 간이침대에서 자는 게 편하고 적격이었다. 물신(物神)이 걸려있고, 서까래나 바닥 틈새에 숨어있던 이름 모를 벌레들이 밤만 되면 기어나오는 조선의 여관방을 생각하면 이 야외침대는 천국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사나울 때면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여관방을 찾게 되었다. 진흙 벽과 진흙바닥, 그리고 진흙 천장으로 된 여관방은 키가 180cm가 넘는 아펜젤러에게는 똑바로 설 수도 없는 좁은 공간으로, 여기서 이리저리 부대끼는 일이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방안의 진흙 냄새가 코를 찌를 때에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을 지새곤 하였는데, 이야기의 주제는 미국과 조선의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의 미래에 관해서였다. 결국 화제의 중심은 언제나 조선이었다.

조선은 아직까지는 비기독교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절망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저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유제와 덕산교회 공동체는 많은 핍박과 박해의 모함 속에서도 선교사들의 방문은 큰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환난 중에 큰 위로로 복음증거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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