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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진포구
  • 입력 2021.03.08 11:18
  • 수정 2021.03.15 21:44
  • 호수 1346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오섬포구 3
당진의 관문이었던 ‘오섬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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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섬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다. 당시 오섬은 당진에서 인천으로 가는 정기여객선을 타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60세 이상의 당진 출신 주민들 중에는 오섬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타고 서울을 드나들었다던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오섬에는 여관이나 음식점, 상점 등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도시의 신문물도 오섬포구를 통해 당진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미니스커트 입고 당진을 들어오는 관문이 오섬이었어요. 아이들이 놀다가도 배 들어온다고 하면 쭉 서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여객선에는 사람 말고도 주로 쌀도 실었는데, 밀도살한 돼지도 실렸었어요. 그러면 경찰이 한 명씩 파견을 나와서 그걸 조사하곤 했어요. 쇠꼬챙이를 들고 쭉 찌르면 벌써 기름이 묻어 나온다구. 그러면 일단 배에 못 싣게 하는 거죠.” (안명수)

안명수 씨에 의하면 오섬에 경찰초소가 있어 경찰 1인이 머물며 항구를 드나드는 어선의 출항과 치안을 담당했다. 경찰초소 외에도 오섬에는 김홍기 씨 등이 운영하는 여관(여인숙), 담배나 소주, 잡화 등을 판매했던 상점 5~6개, 술을 파는 주막 7~8개 가량이 존재했다.

“계란 같은 물건을 팔러 서울에 올라가려고 오섬에 왔다가 풍랑주의보라도 내리거나 물때를 놓쳐서 배를 못 타게 되면 하루씩 머물다 가곤 했어요.” (안명수)

오섬은 일제강점기부터 항구로 발달한 탓에 신작로 개설도 당진에서 일찍이 이뤄진 곳이었다.

“일본사람들이 쭉 뻗은 도로를 만들고 고잔이라는 데에 저수지도 만들고 그랬잖아요. 비포장치고는 폭도 꽤 넓고 좋았어요. 당시에 다른 마을과 비교하면 오도가 그래도 월등히 낫다고 봐야죠. 송산면 내에서 전기가 먼저 들어온 것도 오도고요. 그때 시골 사람들이 물때를 아니까 이때쯤 배가 들어온다는 걸 알고 면천·순성 등지에서 아줌마들이 쌀, 보리, 콩, 참외, 집에서 만든 동동주 등을 들고 와 생선이랑 바꿔갔어요. 특히 선원들이 동동주를 좋아하니까 고기를 듬뿍 퍼주었죠.” (안명수)

우현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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