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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입력 2021.07.07 08:35
  • 호수 1363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송산 섬돌매
파인스톤 골프장 자리에 있던 섬돌매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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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해변이 길게 펼쳐진 시루지는 지역주민들의 옛 추억이 가득한 소풍장소였다. 날씨가 온화할 때 신루, 즉 신기루가 잘 나타났다 하여 신루지 마을로 불리다 시루지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두봉산에 오르면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 물안개가 번지는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 같던 시절이 있었다. 

“시루지가 조수간만 차이로 물이 쫘악 빠지면 판판하니 비행장 같아4요. 고기들이 살그물을 수심 2m까지 높이 쳐 놨으니까 (썰물 때보면 그물에 걸렸지). ” (우동기) 

1960년대 시루지에서는 전통어업인 살이 이뤄졌다. 살은 갯벌에 통나무를 박고 싸리나무로 엮은 발을 쳐서 썰물과 밀물이 드나들 때 고기를 잡는 어업방식이다. 시루지 앞바다에는 복희살(복기살), 갯섶살(갯섬살), 삼봉살(삼봉녀)이라 불리는 살매기가 이뤄졌다. 

주민들의 구술에 따르면 살을 매려면 우선 싸리나무가 필요했다. 1970년대 성구미어촌계장을 지낸 유금준 씨에 따르면 싸리나무는 서산 등 외지에서 사 왔다. 싸리나무를 여러 사람이 함께 엮어 그물 형태로 만든다. 그리고 갈대를 이용해 조금 더 촘촘한 발을 짠다. 바다에 통나무를 박고 싸리나무와 갈대로 엮은 발을 서로 겹쳐 친다. 

이때 발을 부채꼴 모양으로 치는데 꼭지점 부분에는 임통이라 하여 둥글게 고기가 모이는 곳을 만들었다. 임통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렇게 친 살에는 주로 밴댕이, 준치, 간재미, 꽃게 등이 잡혔다. 썰물 때 대나무로 만든 부개를 들어가서 고기를 건져왔다. 어족이 풍부하던 시절이라 부개로 수차례씩 날라야 할 만큼 임통에는 늘 고기가 한가득이었단다. 

“한 번은 살에 갔다 오라 해서 가보니 그물이 없는 거예요. 가까이 가보니까 밴댕이가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그물코마다 콕콕콕 박혔어. 그래서 그물이 넘어간 거야. 그래서 거기에 지게 받쳐놓고 집까지 3km 정도 됐는데 뛰어가서 아버지더러 ‘클났유, 그물 다 넘어갔유’ 그랬지. 그랬더니 아버지가 가서 따오셨지. 그게 아마 나 국민학교 3~4학년쯤이었을 거여.” (손국현)  

“시루지에 굵은 모래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또 고운 모래가 있어서 우리가 시골서 자랐어도 흙 한 통 안 묻히고 자랐어요. 전부 모래였기 때문에. 저녁에 물 들어오면 물장난도 치고 조금 커서는 시루지에서 생계를 유지했죠. 우리 아버지께서 갯섶에서 살을 매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드는지 그물 쳐놓고 운동화 신고 들어갔어야 했어. 꽃게가 막 바닥에 깔려가지고 물어서. 내가 그물을 좀 맸고. 그때는 참 고기가 흔했어요.” (김명환) 

이렇게 잡은 생선들은 여자들이 ‘다라’에 이고 나가 팔았다. 마을을 다니며 생선을 팔고 쌀·보리 같은 곡식을 받아 왔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다라에 생선을 이고 나가서 쌀·보리 같은 걸로 바꿔 오시고 나중에는 버스를 타고 다니시면서도 파셨죠.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지 5년쯤 됐는데 고생하셨어요.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장마다 생선을 이고 다니셨으니.” 

우현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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