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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하마석·도둑개미…대난지섬 곳곳에 얽힌 설화
[우리마을 이야기 8] 석문면 난지1리

넓은 백사장, 붉은 노을, 그리고 보드라운 갯벌까지
학생 100명 넘던 난지국민학교…졸업 후엔 인천으로
김예나l승인2021.07.12 18:55l(13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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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있는 보호수와 누구도 찾지 않는 열녀문, 그리고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들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본지에서는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기획취재를 통해 기사와 영상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낼 계획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 드론으로 촬영한 대난지섬의 모습

도비도 선착장에서 20분 정도 배를 타고 달려가면 당진의 가장 큰 섬인 ‘대난지섬’에 닿는다. 길게 뻗은 해수욕장과 저녁 무렵 붉게 물드는 석양은 주민들이 인정하는 대난지섬의 자랑이다.

‘대난지’, ‘큰난지도’라 불려

대난지섬은 석문면 난지1리를 말한다. 주민들은 난지1리라는 이름보다 ‘대난지’, ‘대난지섬’, ‘큰난지도’하고 부른다. 난지1리는 30년 전 만해도 양지말, 건너말, 골마을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현재는 하나의 마을로 통합된 상태다.

황룡 죽은 자리에서 난초가 무성

‘난지’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석문면지와 당진시대의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난지섬은 하(河)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섬에 표류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하 씨의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내일 청룡과 황룡의 결투가 있으니 그때 너는 내가 주는 활과 화살로 청룡을 쏘아라”라고 말했다. 하 씨가 꿈에서 깨어보니 머리맡에 활과 화살이 놓여있었고, 다음 날 실제로 두 용의 결투가 치러졌다. 그때 하 씨가 화살을 잘못 쏘아 청룡이 아닌 황룡을 맞혔다. 하 씨는 자신의 잘못으로 황룡을 죽게했다는 회한에 젖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황룡이 죽은 자리에 난(蘭)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으며, 이후 하 씨가 죽고 난 무덤에서도 이상한 풀들이 자랐다. 사람들은 이 풀을 지초(芝草)라고 불렀고, 난초와 지초가 많이 자라 난지섬이 됐다는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

▲ 드론으로 촬영한 대난지섬 해수욕장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난지섬과 옹진군 대부면 풍도 사이의 물살이 거세 배가 다니기 어려워 난지(難地)섬이라고 하던 것에서 한자가 변경된 것이라고도 한다. 본지 제200호에 게재된 기사 ‘섬, 섬사람들’에 의하면 난지섬에는 출난과 원추리난 등 야생난이 많이 서식하고 있고, 지초도 많이 자생했지만 1960년대 대난지섬에 홍역이 대유행하면서 아이들이 홍역을 앓았고 그때 지초를 약으로 다려 먹어 지초가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적들의 아지트 ‘도둑개미’

청룡과 황룡 전설 말고도 난지도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난지섬에 중국 사신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그때 마을의 고개인 왕재와 바위 하마석의 이름이 붙여졌단다. 왕재는 중국왕의 아들이 난지도에서 수양을 하고 갔는데 그때 그가 언덕같은 조그마한 재를 넘었다고 해서 왕재라고 불리게 됐다고. 하마석은 난지분교 위쪽에 옹달샘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변에 중국사신들이 살았고, 사신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옹달샘 앞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말에서 내리곤 했는데 거기에 바위가 있어 하마석이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것이다.

▲ 선녀바위

난지도 선착장 옆에 있는 선녀바위는 선바위라고도 불렸다. 선녀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모양의 바위인데 옛날에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간 낭군이 돌아오지 않자 아낙이 섬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바위가 됐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 도둑개미

또한 선녀바위 옆에 위치한 도둑어미는 대난지도 해안가에 도둑(해적)들이 숨었다가 경창으로 운송하는 세곡선의 관곡을 빼앗던 곶을 말한다. 도둑어미에서 도둑에미, 도둑개미로 이름이 변했다.

▲ 난지분교

전교생 수 3명 난지분교

난지섬 주민들이 섬을 떠나 육지로 갔고, 마을이 고령화 되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줄었다. 40년 전 난지분교는 난지국민학교였는데 그 당시 재학생은 100명이 넘었다. 그러나 현재 난지분교의 전교생은 3명 뿐이다. 난지분교 출신으로 올해 46세인 이승연 총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해도 전교생이 38명이었다. 그의 11살 난 자녀가 현재 난지분교에 다니고 있다.

▲ 난지1리에서 만난 주민들

과거 난지1리는 학군이 인천에 속했다. 난지국민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으로 중·고등학교를 가야했던 것이다. 당진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으면 육지로 전학을 가야했다고. 이후우 전 이장은 “학군이 인천이라 난지섬 출신들이 인천에 많이 살고 있다”며 “우리 때는 어린 나이에 인천에서 자취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야기 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 내가 난지국민학교 다녔을 적이었어. 여기 뻘이 보령 머드 마냥 무척 부드럽고 좋았거든. 그때 친구들이랑 발가벗고 데굴데굴 뻘을 굴러다녔는데…. 한참 옛날 이야기지.”

▲ 송병국 이장, 차동석 전 이장, 이후우 전 이장, 이승연 총무

“마을회관까지 물 들어와”

올해 85세인 차동석 전 이장이 5살 때만해도 마을회관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제방을 건설하면서 간척지가 됐고, 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또한 식재료 등을 사러 가기 어려워 자급자족 하기 위해서 주민들은 약간의 밭농사를 짓고 있다. 이후우 전 이장은 “어렸을 때는 배를 타고 육지에 간다는 생각을 못했다”며 “가끔 집안 대소사가 있을 적에만 배를 타고 나갔다”고 말했다.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세월의 흐름 따라 타고 다닌 배도 달라졌죠. 과거에는 통통거리는 배를 타고 나갔고, 지금은 여객선을 타고 나가죠. 어렸을 적에는 난지섬에 들어오는 배가 하루에 하나밖에 없어서 한 번 나가면 밖에서 자고 다음 날에나 집에 올 수 있었다니까요.”


김예나  yena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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