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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9] 고대면 당진포2리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요충지였던 ‘당진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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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조제 막기 전엔 해산물 풍부한 어촌마을”
간척사업 및 도로 건설에 성돌 사용…진성 흔적 유실

<편집자주>
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있는 보호수와 누구도 찾지 않는 열녀문, 그리고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들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본지에서는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기획취재를 통해 기사와 영상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낼 계획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 드론으로 촬영한 고대면 당진포2리

고대면 당진포리는 대호호 상류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 중심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대호만을 막기 전까지만해도 당진포리는 해산물이 풍부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 중 당진포2리는 조선시대 곡물 현물세를 보관하던 ‘해창’과 1514년에 쌓았다는 토석성인 ‘당진포진성’이 자리한 곳이다.  

마을의 옛 이름 ‘해창‧큰산‧탕주막’ 

당진포라는 이름은 백제시대 말부터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어 붙여졌다. 주민 고창세 씨는 “당진포리는 당진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마을”이라고 말했다. 
당진포2리에는 현재 110세대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해창, 큰산, 탕주막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으며 지금은 1반, 2반, 3반으로 불린다. 
해창은 앞서 말했듯 조창이 자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으며, 큰산은 공장이 들어서 당시 모습은 없지만 꽤 높았던 산이 있었다고 한다. 탕주막의 경우에는 수심이 얕은 지역이라 배를 잡아 끌어놓았던 곳이라서 이름 붙여졌다. 

▲ 1960년대 촬영한 고대면 당진포2리 해창성결교회 교회학교 어린이들과 교사들

어업이 주였던 지역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수도작에 종사하고 있다. 한우농가, 양록농가, 양계농가 등이 조금씩 분포돼 있지만 수도작이 가장 많다. 그러나 당진포2리는 본래 어업이 중심이었던 어촌마을이다. 1983년 대호만을 막으면서 어업활동이 중단됐다고. 주민 고창세 씨는 “간척사업 전에는 집 앞까지 물이 들어와 수영을 하고 소라, 꽃게 등 해산물도 많이 잡았다”고 말했다. 

▲ 1960년대 촬영한 고대면 당진포2리

늦게 알려진 진성의 가치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5호로 지정돼 있는 당진포진성은 1514년 조선시대 해안 방어를 위해 세운 성이다. 망재산 인근에 석성으로 축조했는데, 일대에 도로가 생기고 방조제 건축 당시 성돌을 가져다 사용하면서 거의 유실돼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이유호 전 이장은 “귀한 줄 모르고 과거에 여기저기 사업하는데 성돌을 사용했다”며 “당진포진성의 성돌은 불그스름 했다”고 말했다. 

사학자들은 진성이 위치한 곳의 북쪽으로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으로 돼 있고 전면은 시야가 탁 트여있어 배들이 풍랑을 피하는 동시에 왜구에게 노출되지 않는 곳으로 ,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 (왼쪽부터) 고대면 당진포2리 이유호 전 이장, 이순길 이장, 주민 고창세 씨

이순길 이장은 “주민들이 진성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안됐다”며 “주민들은 옛날에 이곳에서 당제를 지냈고, 성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학자들이 진성을 발견하면서 주민들도 진성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당진포진성 앞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맑은 날에는 난지섬까지 내다보일 정도였고, 나루 앞에 수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단다. 지금은 무성하게 자란 풀들로 걸어 올라가기 힘들지만, 정상에 오르면 해창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이순길 이장은 “당진포진성이 관리가 잘 안되고 있어 아쉽다”며 “지자체와 주민 모두 함께 지역의 유산을 신경써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창세 씨는 “당진이라는 이름이 당진포에서 유래된 만큼 지자체에서 당진포진성을 관리하는데 힘써주길 바란다”며 “또한 이곳이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1960년대에 촬영한 해창성결교회 교인들

풍어와 안녕을 기원한 당제 

한편 당진포진성 위쪽 가장 높은 부분에는 해창당이 자리했다. 이 당은 194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당제를 지냈던 곳이다.
이유호 전 이장은 “당집 주위에 매우 큰 팽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며 “수명이 오래된 수십 루의 나무들이 당시 모두 베여 현재는 흔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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