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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가 선택한 풍수 좋은 마을
우리마을 이야기 15 (마지막 편) 당진3동 시곡2통

태백산·매봉산·달봉산·요강산 등 산골마을
덕산 보부상들이 쉬어가던 ‘거리막’
김예나l승인2021.10.01 21:54l(13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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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있는 보호수와 누구도 찾지 않는 열녀문, 그리고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들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본지에서는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기획취재를 통해 기사와 영상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낼 계획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 드론으로 촬영한 당진3동 시곡2통의 모습

당진3동 시곡2통은 태백산, 요강산 등 여러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시곡천이 흘러 풍수가 좋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시곡2통은 태종 이방원이 충신인 윤황이 죽자 무학대사에게 좋은 곳에 묻어 달라고 청했고, 무학대사가 자리를 잡아 장사를 지낸 곳으로 전해진다. 이후 무학대사가 주민들에게 이 마을의 이름을 아래구물(하공정리), 윗구물(상공정리)로 불러야 부자가 될 수 있고 편안히 살 수 있다고 해서 주민들은 현재까지 마을 부락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김남홍 통장은 “시곡2통에 살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서 과거에는 윗구물에 사람들이 몰렸다”며 “서산, 덕산 등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마을에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옛 지적도를 보면 1500석, 2000석 지주도 시곡2통에 살았다”고 덧붙였다.

▲ 시곡2통 지적도(표지)

“둥근 달 먼저 보려고 뛰어간 달봉산”

시곡2통에는 산이 많다. 태백산은 시곡동과 원당동에 걸쳐 있는 야산으로, 흰 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매봉산은 매를 닮아 이름 지어졌고, 달봉산은 달이 가장 먼저 보여 이름 불려졌다. 요강산은 신암산, 매방산, 태박산과 이어진 맥으로 시곡1·2통 끝자락에 위치한 산이다. 

▲ 1993년 12월 2일 벼탈곡 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

최상춘 노인회장은 “어릴 적 정월대보름에 친구들보다 달을 먼저 보려고 달봉산을 뛰어오르곤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김남홍 통장은 “새벽 안개가 짙은 날에 요강산에 오르면 시곡동 일대가 강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시곡2통에 자리한 ‘가림막’이라는 곳은 면천현감이 현을 순행할 때 쉬던 막사로, 주민의 눈을 피해 쉬었던 곳이다. 가림막 밑에 있는 ‘거리막’은 보부상들이 쉬어가던 주막거리로, 덕산의 보부상들이 거리막길을 통해 기지시장을 다녔다고. 순성면 갈산리에서 시곡2통까지의 길이 5리라 ‘오리골길’이라고 불렸던 곳도 있단다. 더불어 마을에는 섭해탕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시곡2통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기념비

시곡2통 지키는 500년 보호수 

시곡리에는 보호수도 3그루나 있다. 소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로, 모두 500년이 넘은 보호수다. 그 중 느티나무는 조선의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희생된 사육신인 성삼문의 후손이 계유정란을 피해 시곡2통에 내려와 숨어 살면서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다. 또한 ‘창녕 성씨 소나무’ 두 그루는 창녕 성씨 문중의 수군 절도사 성길준의 묘에 그 자손이 심은 나무라고. 이 나무는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나뭇가지가 하나씩 고사됐다고 전해진다. 이 소나무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했으나 마을에서 필사적으로 지켰다고 한다. 

▲ (왼쪽부터) 이천운 노인회 총무, 성낙현 개발위원, 김남홍 통장, 최상춘 노인회장

“대부분 노인…역사 전할 젊은이 없어 아쉬워”

한편 시곡2통에는 47가구의 주민 12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라고. 이에 지역의 원로들은 마을의 유래와 역사들이 그대로 묻힐까 고민이 많다. 김남홍 통장은 “지역의 토박이로서, 통장으로서 시곡 2통에 대해 공부했다”며 “그러나 이제는 우리 마을의 역사를 이어갈 젊은이들이 없어 아쉽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앞으로도 주민들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코로나19가 종식돼 하루 빨리 주민들이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 1985년 5월21일 모를 심고 있는 주민들
▲ 1991년 겨울방학을 맞아 마을회에서 충훈교실을 진행했다.

김예나  yena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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