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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시줄다리기와 한평생을 함께 한 구자동 기·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줄다리기, 평화와 화합의 상징…‘함께’라는 가치

“뒷걸음질 치며 내 편으로 끌어와야 이기는 줄다리기”
60년 동안 기지시줄다리기에 매진…은관문화훈장 받아
박경미l승인2021.12.17 21:41l(13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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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에서는 줄을 만드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고 값진 것이다. 줄을 만드는 데는 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 승부의 양상은 우리의 독특한 고유 방식이다. 모든 겨루기가 상대방의 진지에 들어가 정복하여 평정하는 것이 방식인데 줄다리기 승부만은 반대로 뒷걸음질 쳐야만 이기는 독특한 놀이다. … 상대편을 내 편으로 끌어와서 동화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 하나된 판에서 승자와 패자의 구별 없이 더덩실 춤을 추며 승리를 외쳐 모두가 하나가 되는 모습은 줄다리기의 참모습인 것이다. … 신분의 구별 없이 사는 곳의 구별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우리의 귀중한 무형의 무한한 자산인 것이다.” (구자동 옹이 당진시대에 기고한 ‘신비스런 민속 기지시줄다리기’ 중에서)

 


故 이우영 선생을 만나며

송악읍 가교리가 고향인 구자동(77) 옹은 어렸을 적부터 기지시줄다리기를 보며 자랐다. 유네스코 지정을 준비했던 지난 2010년부터 기지시줄다리기 민속축제가 매년 개최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는 윤년에만 이뤄졌다. 4년에 한 번 줄다리기 날이 돌아오면 마을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썩이곤 했다. 줄을 제작하면 공동묘지(현 송악문화스포츠센터) 앞에서 줄다리기 경기가 진행됐고 주민들은 비탈진 공동묘지에 모여 줄다리기를 구경하곤 했다.

“줄다리기 날이면 기지시장터에 사람들이 붐볐어. 농사 짓고, 물건 팔고, 어업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지. 줄난장 한 번 하고 나면 이때 장사한 돈으로 3년은 거뜬히 산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만난 사람이 대동약방을 운영하던 故 이우영 선생이다. 초대 기지시줄다리기 인간문화재인 이우영 선생과의 만남으로 구 옹은 기지시줄다리기에 매진하게 됐다. 

 

60여 년간 기지시줄다리기에 매진

이 선생과 함께 구자동 옹도 그 시절을 함께했다. 그러다 지난 1973년 기지시줄다리기 대제를 전후해 지역민들 사이에서 기지시줄다리기 존폐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수백 년 내려온 전통인데 끊을 수 없다”는 노년층 중심의 여론과 “소득도 없고 힘만 들뿐 의미가 없다”는 젊은층 일부의 의견이 충돌하며 마을 사람들이 찬반 논쟁을 벌였고, 충남도 문화재 지정 여부로 기지시줄다리기 존폐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지정 추진을 시작했고 가장 중점적으로 이뤄진 작업이 지역 원로를 대상으로 한 구술 채록이었다. 이 과정에서 구자동 옹은 역사 고증을 위해 원로들의 구술을 채록하는 일부터 신청 절차에 필요한 행정 업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 결과 1973년 기지시줄다리기가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지시줄다리기에 대한 외부의 관심과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국풍81(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 계승이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한 관제적 성격의 문화축제) 행사에 기지시줄다리기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구자동 옹은 “한 달 동안 줄을 만들어 서울 한강 고수부지에서 일주일 동안 줄다리기를 했다”며 “여름철이라 비가 오면 줄이 썩으니 틈틈히 줄을 보수해가며 다렸다”고 말했다. 이어 “길이 200m, 무게 40t에 이르는 원형 줄로 줄을 다리니 사람들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며 “이때 기지시줄다리기의 진가를 인정받아 1982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외에도 2006년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 참여해 시민 화합 줄다리기 행사를 진행했으며, 2000년 서해대교 개통기념 화합 줄다리기, 2011년 기지시줄다리기 박물관 개관, 2015년 기지시줄다리기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 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미안”

1963년부터 60여 년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과 전승에 힘써온 구자동 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훈장을 받기 전까지는 덤덤했는데 막상 유공자 시상식에서 나라에서 인정하는 훈장을 받으니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이 보람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어 “나 혼자 잘해서 훈장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며 “수훈의 영광을 500여 년 동안 기지시줄다리기를 지켜온 지역주민과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원들, 그동안 전승 활동을 참고 인내해준 가족들에게 돌리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한평생을 기지시줄다리기에만 몰두했다. 기시지줄다리기 추진위원회 간사를 비롯해 기지시줄다리기 이수자, 전수교육조교를 거쳐 200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 기·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인간문화재 칭호를 받으면서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

특히 당진의 전통문화를 잇느라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구 옹은 “무엇보다 아내와 가족들에게 죄스럽다”며 “기지시줄다리기에 매달리느라 가장으로서 제대로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

전통을 보존하려는 과정에서도 나름의 변화는 있었다. 줄다리기를 추진하는 구성원 가운데 기지시장의 쇠퇴로 상인들의 참여가 줄어들면서 송악지역 주민 리더 그룹이 참여하게 됐다.

줄다리기의 운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기지시줄다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기지시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에 따르면 ‘당사’라 불린 국수봉의 제사는 줄다리기 행사와 무관했다. 그러나 당제로 이름이 바뀌어 행사에 포함됐고, 당제 후에 지내는 샘고사 또한 용왕제로 바뀌어 행사에 포함됐다. 

또한 주민들의 종교가 다양하게 변했다는 이유로 1974년 이후로 유불선의 제사를 모두 거행하기 시작했다고. 윤년이 드는 해마다 치러졌던 대제 행사 사이에 소제 행사가 시작된 것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이후다. 구 옹은 “윤년마다 행사를 하는 것은 연속성이 없어 민속학자들은 유네스코 지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년 행사를 개최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그래서 2010년도부터는 매년 줄을 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형체가 없는 무형문화재이기에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구 옹은 “사람들과 호흡하면서 당시 형편, 시대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문화재의 가치는 ‘정통’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전통’을 좇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줄 제작법의 원형을 이어온 것처럼 기지시줄다리기가 잃지 않고 오랜 세월 지켜온 가치는 ‘함께’라는 정신이란다. 구 옹은 “기지시줄다리기는 화합과 단결의 상징”이라며 “너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줄다리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거대한 줄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옮기고, 서로 당기며 승패를 떠나 모두가 하나가 되는 모습이 줄다리기의 참모습이라고 전했다.


박경미  pkm94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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