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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29 21:58
  • 수정 2022.10.28 17:19
  • 호수 1403

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사람들
[우리 이웃의 밥줄 이야기 1] 장애인활동지원사
박명숙·이미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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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턱만 봐도 휠체어로 오를 수 있을지 생각해요"
"이용자 만나는 생각하며 출근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편집자주>

다양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편견에 사로잡혔던 시선을 바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기획취재 <우리 이웃의 밥줄 이야기>는 지역에 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들의 삶의 애환과 따뜻한 인간애를 당진시대 기사와 유튜브 영상을 통해 전할 계획이다. 기사에 관련한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2007년 장애인복지법에 의거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가 최초로 시행됐다. 불과 15년 전이다. 그전까지 장애인들은 외출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도가, 그리고 직접 일을 하는 장애인활동지원사들이 장애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준다. 때로는 입이 되고 눈이기도 하다. 장애인활동지원사로 근무하고 있는 박명숙·이미영 씨를 만났다.

“활동지원사 박명숙입니다”

박명숙 씨(53)가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한다는 소리를 들은 친구가 “네가 그 일을?”이라고 말하곤 했단다. 장애인을 보조한다는 것이 마냥 고되다는 편견 덕이다. 하지만 보조하는 장애인과 마음만 맞는다면 더없이 뿌듯하다는 박 씨다. 박 씨가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됐다. 사실 처음부터 이 일을 시작하려는 건 아니었다. 연세가 있는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일이 바로 구해지지 않자 장애인활동지원사로 눈을 돌렸다. 

“처음 일 나갔었을 때요? 아직도 기억나요.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집에 가니 유리창 청소를 하라는 거예요. 그날이 창문 청소하는 날이라나. 무더운 여름에 32평짜리 집 창문 닦느라고 고생했죠.”

“제가 보호자에요”

이미영 씨(53)는 장애인활동지원사 일을 시작한 지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지인의 소개로 시작한 일이었다. 

“제가 어디서 선생님이란 소리 듣고 보호자 역할을 하겠어요. 장애인분들은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때론 보호자 역할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하죠.”

현재 그는 지적장애 모자(母子)의 활동지원사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모자에게 후견인이 생겼지만 없을 때는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물론 지금도 두 모자가 당진시장애인복지관을 오지 않는 날에는 집에 가서 밥을 해주고, 복지관에 오는 날에는 동행을 돕는다. 실질적인 보호자인 셈이다. 그는 “출근할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다”며 “좋은 대상자를 만나면 늘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는?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혼자서 생활하기 힘든 장애인의 사회참여와 자립생활을 위해 제공하는 지원 서비스다. 이 서비스 제공자로 참여하는 인력이 요양보호사와 방문간호사, 그리고 장애인활동지원사다. 장애인활동지원사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활동지원사 교육기관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을 말한다. 활동 지원인력이 되기 위한 자격에는 학력과 나이 제한이 없다.

장애인활동지원사가 하는 일은 개인 위생관리와 식사 도움, 이동 도움을 비롯해 가사활동으로 청소와 주변 정돈, 세탁, 취사 등이 포함돼 있다. 즉 장애인들이 혼자서 하기 힘든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이다. 현재 당진에는 300여 명의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애인과 같이 넘어지기도”

뿌듯함과 별개로 어려운 점도 있다. 박 씨는 “극단적인 장애인 중에서는 가끔 장애인활동지원사를 막대하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자르기도 한다”며 “파리 목숨인 셈”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용자와 마음이 맞아도 보호자와는 또 달라서 관계가 틀어질 때도 있단다. 

또 체력이 쓰이는 일도 많다. 거동이 불편한 이용자의 경우 이용자를 휠체어로 들어 올려 옮겨야 한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하다 보면 나름의 요령이 생겨 손과 발 다 써가며 일하곤 한다. 박 씨는 “처음에 남성 이용자의 소변 활동을 돕는데 제대로 몸을 잡지 못해 같이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며 “지금은 꾀도 나고 요령도 생겨서 일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가끔은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들도 있다. 박 씨의 경우 당진으로 이사하기 전 9살의 이용자를 만나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돌봤다. 근육이 굳는 병을 앓았던 이용자는 몇 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됐다. 그는 “한 번 더 그 아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지 못하고 아이를 떠나 보냈다”며 “아이와 헤어질 때도 많이 울었는데,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건강할 때까지 일 하고파”

이 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인식 변화는 물론 가족의 생각 변화까지 크다고 두 사람은 입 모아 말했다. 이 씨는 “이 일을 하기 전에 장애에 대해서 잘 몰랐다”며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장애인들이 불편을 느끼는 부분들을 알게 됐고, 주변에서 장애인들이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박 씨는 “이용자 없이 식당을 가더라도 턱을 볼 때면 ‘여기는 휠체어로 못 올라오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나도 인식이 달라졌고 가족들이 장애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저는 정년인 70세까지 몸이 건강하다면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면서 나만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타심과 인내심이 많이 길러졌어요. 그만큼 제 마음도 너그러워졌어요.”(이미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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