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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6 19:56
  • 수정 2022.05.09 10:56
  • 호수 1404

[출향인을 만나다] 석문면 삼봉4리 출신
김애경 서울특별시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아이들을 향한 사랑, 동요로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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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초·석문중·호서고 졸업 후 공주교대 진학
”선생님~“ 부르며 뛰어와 품에 안기던 제자들
동요 작곡 40년…시인 남편이 작사 맡아
”시대와 세대 초월해 불릴 동요 만들고 싶어”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데 버스로 1시간이 걸렸어요. ‘털털 길’을 버스 타고 다니면서 영단어를 외우고 책도 읽곤 했어요. 하교할 때 버스에서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면서 집에 가는 게 사춘기 소녀의 낙이었죠.”

석문면 삼봉4리에서 나고 자란 김애경 교육장은 아직도 고향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단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자습하다 막차를 타기 위해 뛰어다녔던 기억, 집에서 키운 토끼를 잡으러 눈쌓인 동네를 헤매던 기억,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언니 오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기억, 부모님이 키운 꽃들을 보면서 좋아했던 기억 등 모두 그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만나는 제자들

그는 초등학교 1~2학년 때부터 교사의 꿈을 키웠다. 다시 태어나도 교사가 될 것이라는 그는 “삼봉국민학교(현 삼봉초) 3학년 때 교대를 갓 졸업한 성명숙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며 “나를 많이 예뻐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수업할 때 칭찬을 많이 해주셨던 그 선생님을 많이 좋아했다”며 “그 기억때문에 성명숙 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전했다.

당시엔 2년제였던 공주교대를 졸업한 뒤 21살에 경기도 안양시 관양초에 부임했다. 올해로 교직생활을 한 지 만39년이 된 김 교육장은 “첫 담임 교사를 맡았을 때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60명의 제자들을 엄마의 마음으로 대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느 날 조부모 손에서 어렵게 자란 학생 한 명이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아파하면서 울더라고요. 그 모습을 볼 때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었죠.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아이가 살아왔던 환경을 생각하니 너무 안쓰러웠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저 역시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 아이들의 엄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모든 아이들의 이름 외우기도

김 교육장은 ‘언니 같이 친근한 선생님’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교문에서 김 교육장을 보면 “선생님~”하고 부르면서 그의 품에 폭 안기기도 했다. 

아이들과 친해지니 그만큼 소통도 원활해졌다. 그는 “제자들이 써준 편지를 모아놓고 종종 읽는다”며 “편지에는 ‘우리의 잘못을 알고서도 속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게 바라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다른 우리들의 재능을 찾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의 내용이 써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의 편지를 읽고 감동했다”며 “각각의 재능을 찾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현재 김 교육장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와 중랑구에 소속된 학교를 관할하는 서울특별시 동부교육지원청에서 교육장을 맡고 있다. 동부교육지원청에는 유치원 60곳, 초등학교 45곳, 중학교 29곳, 고등학교 21곳으로 총 155개 학교가 소속돼 있다. 그는 “교육활동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지원하는 것이 교육지원청의 역할”이라며 “현장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교육현장을 찾아 애로점을 찾고 지원해주는 교육장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공주교대 출신 1호 교육장이기도 하다. 그는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라는 소신을 갖고 늘 살아왔다”며 “많은 분들에게 축하를 받아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 여자 작곡 그 남자 작사

한편 김 교육장은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깊이 있는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를 무척 좋아했던 그는 교회에 몰래 들어가 오르간 연주를 하기도 했다.

예배 중 교회학교 선생님의 연주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똑같이 쳐보기도 했다고. 그래서인지 작곡에 관심을 갖고 1984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어릴 적에는 <나뭇잎배>, <구름> 등의 동요를 즐겨 듣고 따라 불렀다”며 “고무줄 놀이를 할 때도 친구들과 놀 때도 늘 동요와 함께 했다”고 말했다. 

그 당시 김 교육장의 집에는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었다.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백합, 가을에는 과꽃, 겨울에는 키다리국화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부모님(故 김동화, 故임기순)은 바쁘게 농사를 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에 꽃밭을 정성스레 가꿨다. 김 교육장은 “동요를 만들 수 있는 감성을 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셨다”며 감사한 마음을 내비쳤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동요

김 교육장이 작곡한 동요는 시인인 남편 박수진 씨의 노랫말로 완성된다. 김 교육장이 작곡한 동요와 가곡의 대부분을 남편 박수진 씨가 가사를 썼다. 부부가 쓰고 만든 곡 중 가장 대표적인 가곡은 2000년 발표된 <나의 별에 이르는 길>이다.

그는 “1984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며 “창작동요제를 보면서 우리 아이에게 엄마아빠가 만든 노래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이를 위한 곡이 <산이슬비>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음반으로도 나온 곡이다. 김 교육장은 “이 노래가 전국대회에서 1차 예선에 통과했지만 본선에 오르지는 못했다”며 “그럼에도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노랫말 연구도 하게 되고 어떻게 곡을 완성해야 되는지 감을 잡았다고. 

이후 1993년에는 MBC 창작동요제에서 <눈 내린 마을>로 작곡가로 데뷔해 입상했으며, 1995년 2월에는 환경사랑창작동요제에서 <우리 작은 손으로>, 국악창작동요제 <도깨비 방망이>, 1997년 <소리는 새콤 글은 달콤> 등 많은 동요를 세상에 선보였다. 현재 그가 작곡한 곡은 300여 곡으로, 50여 곡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중 10곡이 대상을 수상했으며 교과서에 수록된 곡은 18곡이나 된다. 김 교육장은 “교사로서 교육적인 관점에서 동요 작곡에 접근했다”며 “곡을 발표하는 건 딸을 시집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어 “동요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준다”면서 “아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노래가 ‘동요’에요.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에게 동요를 불러주죠. 노인이 되어서는 동요가 과거의 추억이 됩니다. 요즘 어린이들이 대중가요를 많이 부르곤 하지만 정서 함양을 위해 동요도 많이 들어야 해요. 동요 역시 시대를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시대와 세대가 초월해 불려질 노래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후배를 양성하고 남편과 동요보급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계획이에요. 동요를 만드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불릴 수 있는 동요를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 김애경 교육장은…
- 1962년 석문면 삼봉4리 출생
- 삼봉초·석문중·호서고 졸업
- 공주교대 초등교육·서울교대 대학원 음악교육 전공 
- 현 서울특별시 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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