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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22.05.09 17:14
  • 호수 1404

[기고]복기대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전공 교수
당진의 옛 이름 ‘장구진’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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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唐津)이라는 이름은 중국과 교역을 하던 나루라는 곳이다. 이 지명이 언제부터 쓰여진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 하다. 그러면 당진의 옛 지명은 무엇이었을까? 태곳적부터의 지명은 알 수 없지만 8세기 즉 통일신라 때의 지명이 장구진(長口鎭)이었던 것은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차이나계의 나라 중 당나라의 높은 관리였던 가탐이라는 사람이 당나라, 당나라에 관련 있는 나라들을 오가는 길에 대한 기록을 고금군국지라는 책으로 남겨 놓았는데 이 중에 도리기라는 기록이 신당서에 실려 있다. 이런 기록은 가탐이 스스로 다녀본 길도 있겠지만 다녀온 사람들이 남겨 놓은 얘기나 기록들을 참고로 하였을 것이다. 

그중에 신라 황성 즉 오늘날의 경주와 발해 황성을 가는 길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당대에 문제가 있었는지 후대에 문제가 있었는지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당나라의 사신이 배를 타고 산동반도의 등주를 떠나 여러 섬을 거쳐 신라의 서북 장구진에 이른다는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이다. 이 기록에 분명 신라의 서북 장구진이라 하여 많은 학자가 이곳이 어딘가 하는 연구를 하였다. 그래서 찾은 곳이 지금의 황해도 어디로 비정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장구진이라는 이름의 의미이다. 이 장구진이라는 이름을 보면 굉장히 큰 만의 형태를 보인 곳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를 갖은 곳을 찾아보면 지금의 북한에 황해도 진남포나 개성의 송악 항구, 그리고 지금 인천항 등 여러 곳을 그 후보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다들 추측뿐이었고 확실하게는 확인되지 않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의 황해도 진남포 그 부근으로 생각하였다. 

이 문제를 꼼꼼하게 분석해보고 있던 필자는 가탐의 도리기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래 문장과 위의 문장이 잘못 배열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여러 곳을 지나 신라 서북의 장구진에 이른다는 기록 다음에 ‘여기서 동남쪽 땅 길로 700리를 가면 신라 황성에 이른다’는 기록이 와야 하는데 이 기록이 엉뚱하게 다른 곳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록을 찾아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 놓고 해석을 해보니 배를 장구진에 대고 거기서 동남으로 칠백리를 가면 신라 황성에 도착할 곳은 지금의 당진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의 인천에서 가면 1000리는 가야하고, 황해도 진남포에서 가면 1500리는 가야 하므로 기록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구진이라는 이름과 거기서 출발하여 당시 신라 황성이 있었던 오늘날의 경주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면 당진 이외의 다른 곳은 없다. 필자는 장구진을 당진으로 생각하고 여러 문제를 생각해본 결과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풀려나갔다. 

가깝게는 근대에 청나라군이 아산만으로 들어 온 것이라든지 멀리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왜 장구진의 중심 세력인 면천의 복지겸과 연합을 하였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신라의 마지막 통일전쟁도 이곳을 중심으로 마무리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본다. 앞으로 더 연구해야겠지만 옛날 장구진이 지금의 당진이 확실하다면 당진은 반드시 고대 군사기지로, 고대 경제와 물류의 중심지로, 그리고 지역 정치의 중심지 등등으로 연구가 되어야 할 곳이다. 아마도 장보고의 청해진보다 중요한 지역으로 떠 오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본다. 

관련문헌
복 기 대, ‘『신당서(新唐書)』의 가탐 「도리기」 재해석’,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인문과학연구 Vol.0 No.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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