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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업
  • 입력 2022.08.12 20:40
  • 수정 2022.08.16 10:04
  • 호수 1417

[어르신 영상 자서전 ‘학교 가는 길’ 2] 최종옥 할머니
“일흔이 돼서야 내 인생 찾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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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남매 중 맏이…동생들 돌보느라 학교 못 가
가방 메고 학교 가던 친구들 부러워 샘내기도
결혼 후 시아버지 병수발에 삼남매 낳아 키워
남편과 자녀들의 응원 속에 늦깎이 공부 시작 ​

 

<편집자주>
글을 배우지 못한 70~80대 어르신들은 가난한 집의 살림 밑천이었던 맏딸이었거나, 가방 대신 지게를 져야 했던, 학교 대신 갯벌로 나가야 했던 어린 소년·소녀였다. 해방 전후 태어나 6.25전쟁을 겪으며 사회적 혼란과 절대적 빈곤 속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 한 많은 시절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문해교육에 도전한 늦깎이 학생들의 인생 이야기를 기사와 영상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서글픈 시대와 역사가 오롯이 담긴 삶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지역미디어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또한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맏딸은 살림밑천”이라고 했다. 자녀가 1~2명 뿐인 요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얘기지만 먹고 사는 게 힘들었던 시절, 식구가 노동력이 돼야 했던 시절엔 흔히들 하던 말이었다.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최종옥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라, 동생들은 대학도 나오고 배울 만큼 배웠어도, 최 할머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름 동안 학교에 다닌 게 전부였다. 

“살기 어려웠으니까…. 여자는 안 가르친다 그래서 못 배웠지. 아버지는 나가서 남의집살이 하고 배타는 동안, 어머니는 강냉이 장사해서 우릴 키웠어. 그럼 나는 동생들 보살피면서 밭에 나가 일하고, 보리방아 찧고, 동생들 밥해 먹이고 그랬지. 그러니 나갈 틈이 없었어.” 

교복 입고 학교 가는 동네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나는 애 업고 있는데 친구들은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갔다. 어린 마음에 샘이나 책가방을 뺏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단다.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엔가 학교에 너무 가고 싶어 엄마가 아기를 보는 사이에 슬그머니 집에서 나와 몰래 학교에 갔다. 책 대신 커다란 유리조각을 책 마냥 책보에 싸서 어깨에 메고 학교에 가는 시늉을 냈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교실에 다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고 그는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홀로 서 있었다. 

“혼자 막 엄청 울었지. (친구들은 학교에 있고) 그렇게 나만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뼈가 저리게 울었어.”

결혼 후에도 녹록치 않던 삶

17살이 되던 해 무작정 집을 나와 서울로 갔다. 섬유공장에 들어가 소녀공이 돼 일을 했다. 2년 정도 일하다 친구와 크게 싸우는 바람에 다시 고향인 신평으로 돌아왔지만, 먹고 사는 게 막막한 상황에서 더이상 집에서 버틸 수 없어 이내 도망나왔다. 

최 할머니는 그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했다. 19살이었던 해 12월 27일이었다. 혹한의 추위 속에 다 찢어진 버선에 고무신을 신고 집 나온 그 날, 가난한 소녀에게는 짐이랄 것도 없었다. 갈아 입을 옷 한 벌, 그게 전부였다. 지인의 소개로 우강 어느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결혼하면 삶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결혼 이후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시집도 가난하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24살 시집온 그 해에 시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13년 동안이나 병수발을 들어야 했다. 삼남매 낳아 키우랴, 시아버지 병수발하랴,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최종옥 할머니에게 학교의 문턱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눈과 손발이 되어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다. 남편은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아내의 눈이었고, 글을 쓸 줄 몰랐던 아내의 손이었다. 그리고 글씨를 몰라 버스도 타지 못했던 아내의 발이기도 했다. 최 할머니는 “남편이 편지를 보내면 친구들이 읽어주긴 했지만 내가 글을 쓸 줄 모르니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면서 “글을 배우기 전까지 남편이 항상 같이 다니면서 내 손발이 돼줬다”고 말했다. 최 할머니는 나이 일흔이 다 돼서야 남편에게 답장을 썼다.  

“날씨도 뜨거운데 뙤약볕에 땀을 흘리며 혼자 농사일 하느라 우리 남편 너무 미안해요. 농사지어서 아들 유학까지 보내고, 시집간 두 딸 대학도 보내고, 이제는 나를 가르치시느라 고생 많으셔요. 열심히 할게요. 고마워 당신에게. 아내 최종옥.”

두 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 가는 길

최 할머니는 남편과 자녀들의 응원 속에 60년만에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닌다. 벌써 중학교 1학년이다. 학교에 가기 전 단정히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거울 속 소녀는 이제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되었지만, 마음은 60년 전 10대 소녀 그대로다. 

그는 우강 논길을 한참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당진까지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로도 한참을 가 당진 시내에서 내리면 해나루시민학교까지 또 걸어야 한다. 뙤약볕이 뜨거운 여름에도, 찬 바람 부는 겨울에도 최종옥 할머니는 그렇게 학교에 간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길도 학교 가는 길이라면 늘 설레고 행복할 뿐이다. 

최 할머니는 “글을 배운 지금은 혼자 다니면서 일처리까지 다 할 수 있으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며 “그저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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