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이 고향인 김창순 씨는 1960년에 결혼해 신촌리 수문통에 자리 잡았다. 산촌 고향마을을 떠나 온 새댁에게 바닷가 마을 수문통은 낯설기만 한 풍경이었다. 김창순 씨의 남편은 수문통에서 배를 몰고 아산만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처음에는 시동생과 함께 조업을 하다 나중에는 김창순 씨도 함께 배를 탔다.
“저기 공포리, 삽교천 그 밑으로 다니며 물고기를 잡았어요. 한진까지 가고 그랬죠. 그때 잡아 오는 게 숭어, 강달이, 거물치, 꽃게, 준치는 가끔 가서 한 번씩 한진께 가야 잡았어요. 새우 잡으면 조금씩 팔고…. 뭐 특별히 돈 되는 건 별로 없더라고요. 강달이 같은 것도 잡아 오면 장사꾼이 가져가거나, 이고 다니면서 팔고, 또 남으면 집에 갖다놓았는데 그러다 구데기만 숱하게 끼면 다시 갯고랑에다 집어넣고. 그렇게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막는 바람에 그때는 뭐 손 놓고 그냥 있다가 민물에서 붕어 조금씩 잡았죠.”
김창순 씨는 남편이 잡아 온 생선을 직접 이고 인근 마을을 돌며 팔았다. 1960년대 우강에서는 화폐 거래보다 농산물의 물물교환이 더 흔했다. 함석대야에 가득 담은 생선을 다 팔아도 집에 돌아오는 길, 머리에 인 대야는 무거웠다. 생선값으로 과일이며 감자, 고구마 같은 농산물을 받은 탓이다.
“합덕에서 오는 장사꾼들이었는데, 자전거 타고 와서 조금 떼 가고 그랬죠. 이고 다니며 팔고 남으면 절이고. 배 안 부리는 사람들은 새우 한 사발씩 사 먹고 그랬어요. 부장리, 공포리, 원치 등 들로 이고 돌아다니며 파는 거에요. 여름에는 참외나 이것저것 과일로 받아 오며 장사하는겨. 지금은 고무다라나 있지. 옛날에는 고무다라 아니라 함석다라였지, 함석다라. 그게 얼마나 무거워요.”
우현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