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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22.09.30 20:46
  • 호수 1422

[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수문통 7
수문통의산증인어민장원식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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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통의산증인어민장원식씨(2)

장원식 씨는 1960년대부터 삽교천 방조제 건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운정 리 앞바다(지금의 삽교천 하구)에서 눈장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눈장에 사 용되는 말뚝은 신평에 배를 대고 인근 산에 가서 사왔다.
”우리는 눈장이라고 말뚝 받아놓고 그물 쳐 놓고서 물 들어왔다 나갔다 그물 가서 터는 거여. (중략) 삽교천 위에서 (지금) 내수면, 그게 바닥이 다 고기여. (중략) 말뚝 하나가 5m짜리. 산에 가서 참나무 단단한 놈으로 대야 지. 어지간한 거 갖고는 다 부러져서 소용없어. 신평 말목이라는데 거기 가 서 많이들 사다가 썼지. 그때 당시 나 무 하나에 2000~3000원 했어. 산에 가 서 벼다가 거기서부터 갯고랑이 있어 가지고 배로 싣고 나갔다고. (중략) 한 50개씩 박아야 혀.“
전통어업 방식인 눈장은 말짱(말 뚝)을 바다에 박아 그물이 들물(밀물) 에는 드러눕고, 날물(썰물)에는 일어 서서 그 안으로 물고기가 잡히게 하는 방식이다. 눈장의 경우 그물이 고정식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후에 이점을 보완해서 나온 것이 이동이 용이한 안강망이다. 두 가지 모두 그물의 구가 넓고 길이가 긴 자 루 모양의 그물을 사용했고,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자루의 가장 안쪽 부 분인 ‘불뚝’에 모이게 됐다. 장원식 씨 는 눈장으로 새우, 숭어, 강달이, 거물 치, 준치, 삼치를 주로 잡았다. 그 중 가 장 소득이 좋았던 어종은 새우였다. 눈장을 그만둔 건 삽교천방조제 건설 이 시작되면서였다.
“그거 막으면서 보상 100만 원 타가 지고. 돼지 10마리 사놨다가 1979년 도에 돼지파동 나서 다 내버리고 말았 어. (중략) 사료값도 안 나오니께. 그래 서 인천 가스공장에 들어가서 1년 있 다가 도로 내려와서 다시 배 타기 시 작했지.”
이후에는 담수화가 된 삽교호에서 내수면어업을 시작했다. 이때는 정치 망을 사용해 송사리, 붕어, 해파리 등 을 잡았다. 그중 훈제로 가공해 해외 에 수출하는 송사리가 수입을 올렸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출하느라고 송사리 모루꼬라고
있어. 그게 훈제해가지고 외국에 수출 하는 건디 (중략) 여기 선장이 김경길 이라고 그 사람이 공장을 했어. 여기 저기 삽교천 가서 모래를 파가지고 막 휘집어 놔서 그놈이 아구에 돌이 껴가 지고 수출했다가 도로 빠꾸해 가지고 망했잖아.”
장원식 씨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삽 교천에서 붕어를 비롯한 민물고기를 잡고 있다. 그마저도 코로나19 여파로 상인들의 발길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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