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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소식
  • 입력 2022.09.23 14:56
  • 수정 2022.11.09 14:58
  • 호수 1423

[우리마을 이야기 12] 정미면 천의1리
발 디딜 틈 없던 천의장터…만세운동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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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천까지 바닷물 들어와 황금어장 이뤄
새우젓배·준치배·인천행 똑딱선도 드나들어
산업화 시기 거치며 인구 줄어 마을 쇠퇴

<편집자주>
당진시에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여 있는 마을이 있다. 본지에서는 마을의 전설과 옛 지명,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환경, 열녀문·효자비 등 다양한 마을의 이야기와 마을이 가진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사와 영상으로 담아낼 계획이다. 해당 기사는 유튜브 '당진방송'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합니다. 해당 기사는 유튜브 ‘당진방송’ 채널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천의1리는 명실상부 정미면의 중심마을이다. 정미면행정복지센터를 비롯해 주민자치센터, 농협, 우체국, 학교 등 정미면의 주요 기관이 천의1리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195세대, 인구 470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한때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전성기가 있었다. 1984년 대호방조제가 완공되기 전만해도 천의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천의천이 흘러 바다로 가는 길목이었기에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황금어장을 이뤘다. 장어, 준치, 청게, 황발이, 능쟁이, 짱뚱어, 망둥이 등 없는 게 없었다. 

박영일 천의1리 이장은 “보리 바심(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할 때 준치가 제일 많이 잡혔다”며 “준치배가 몰려들어 준치를 하얗게 산더미처럼 잡아 올렸다”고 기억했다. 그는 “메기와 뭍게도 바글바글 했다”면서 “너무 많이 잡혀서 그땐 지금처럼 귀한 줄 모르고 내다 버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바다에 나가면 늘 풍요로웠다. 

대장간만 5개에 달하던 큰 마을

새우젓배(중선)은 물론 인천 가는 ‘똑땍이배’가 오다던 나루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뗄감)를 해다 소달구지에 실어와 선착장에서 인천 가는 배로 실어 보냈다. 천의리 나루에서 똑딱선을 타면 인천까지 8시간 정도 걸렸다. 

특히 천의리는 당진과 서산을 잇는 길목에 있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천의장터는 4일과 9일에 열리는 오일장이었는데, 당진·서산은 물론 예산·홍성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장꾼만 1500명이 넘었다. 이곳에 우전(소시장)이 섰고, 대장간만 5개에 이르렀다. 박 이장에 따르면 “장이 서는 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 가랑이 사이로 지나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1919년 4.4독립만세운동도 천의장이 섰던 4일에 이뤄졌다.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시작된 만세 행렬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천의장터에서 절정을 이뤘다. 당시 천의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한던 주민들은 이들을 제지하는 일제의 천의주재소 순사들을 물리쳤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천의주재소는 4.4만세운동기념탑이 세워진 자리에 있었다. 원래 주재소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기념비를 세운다고 철거했단다. 

‘똑땍이배’ 타고 인천으로

이렇게 당진의 역사의 중심지가 됐던 천의리는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학생 1000명이 넘던 미호중학교는 폐교됐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장터는 옛 추억으로 남았다. 특히 대호방조제가 건설된 뒤에는 풍요롭던 황금어장도 잃었다. 

천의리는 원래 해미군 염솔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도곡리, 하도곡리, 상곡리 일부를 병합해 천의리가 됐다. 이후 서산군 정미면에 속했다가 1957년 11월에 당진군에 편입됐다. 

거석골·모색골·돌때미 등 자연부락 

천의1리는 6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대호만이 막히기 전까지 바닷가였다는 천의삼거리 앞 하천부터 천의장터까지가 1반(거석골)이다. 장터 동쪽에 있는 2반은 모새골인데, 전에 무쇠를 다루던 곳이 있었다 하여 무쇠골, 무쇳골, 모색골 등로 불린다. 3반은 천의초등학교 부근으로 숭늉골이라 불린다. 용이 누워서 자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었다고 전해진다.

4반은 운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독골 또는 동편말이라 불린다. 독골을 중심으로 아래독골, 윗독골로 나뉘는데 윗독골에는 400년된 느티나무와 150년 넘은 느티나무가 아직도 푸른 수세를 자랑하고 있다. 옛날에는 느티나무를 건드리면 딸만 낳는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했다고.
5반은 천의초 후문 부근 마을로 돌이 많아 돌뗌 또는 돌떼미 마을로 불리며 6반은 정우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로 생겼다.

박영일 이장은 “과거엔 주민 간 반목과 불화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주민들의 화합이 잘 이뤄지고 있다”며 “마을일이 있을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온 주민들이 참여할 정도로 똘똘 뭉친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늘 고맙다”며 “이장으로서 참으로 흐뭇하고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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