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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선의 포구 이야기] 대두런포구 4 간척사업으로 논이 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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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두런포구의 모습

안식교 사업장이 개발된 이후에도 얼마간은 갯물이 들어와 대두런포구에 배를 정박할 수 있었다. 포구가 완전히 소실된 것은 삽교천방조제의 건설이 시작되면서부터다. 

1939년생인 김재운 씨의 기억으로는 1940년대까지만 해도 대두런포구에는 어선이 20여 척 가까이 정박했고, 중선 같은 규모 있는 어선들도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가 결혼 후 잠시 한진포구에서 배를 부렸던 1960년 전후에는 대두런포구에 중선 규모의 어선은 진입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나 어릴 적에는 배가 20척도 넘지. (중선 같은) 큰 배도 있었고. 근데 골이 깊던 것도 인제 오래가니께 흙이 쌓이고 쌓이고 해서 얕아지는 겨. 다 메꿔져서. 여기가 자꾸 좁아져서 인제 포구가 없어지는 거여. 큰 배는 여기로 안 오고 저기 한진 그쪽에다 놓고 다니게 됐지.” (김재운)

둑을 쌓아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여지는 ‘언’지명은 대포리에서도 나타나난다. 대포리는 원대포라고도 하는 대펀과 독원, 피원 그리고 보안이란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이중 포구와 관련 있는 마을은 대펀 즉, 원대포다. 원대포는 옛날에 큰 갯벌 지역이므로 대펄이라 한 것이 변해 대펀, 대포, 원대포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포는 옛 면천군 범천면 소반리 지역으로 소반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약 300여 년 전 삽교천이 유로를 변경해 작은 개가 생겼다고 한다. 소펄·소펀 등으로 불리며, 소포에 어선이 정박하였다. 

소포와 대포는 인접한 마을로, 1960년대 전후 마을 앞 갯벌의 간척사업이 이뤄지기 전까지 하나의 포구를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대두런포구라 했다. 

우현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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