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은행나무는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면천으로 내려와 지병을 앓던 중 거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마지막 날 신령이 나타나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은행나무를 심으라는 계시를 받아 병을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면천의 명물로 꼽히는 면천은행나무는 일제시대에는 백로가 날아와 장관을 이뤘다고 하며, 당시 조선총독부 지정한 보호수였다고 한다.면천은행나무는 지금은 폐교된 면천초등학교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두 그루가 우뚝 솟아 있는데 나이는 11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한 그루는 줄기 지름
신암사는 고려 후기 충숙왕때 능성 구씨 4대손인 이판전의사 구예가 송악읍 가교리에 터를 잡으면서 가문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이때 불상으로 봉안한 것이 금동여래좌상이다. 전체 높이가 88cm인 신암사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금동여래좌상은 지난 1989년 보물 제987호로 지정됐으며, 신암사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한 문중사찰이다.신암사에 얽힌 전설능성 구씨 4대손 구예는 이판전의사를 지내던 중 중국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는 지나가던 길목에 몰매를 맞던 한 젊은이를 목격하게 된다. 구예는 걸
면천의 순 우리말은 ‘밋내’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면천이란 지명은 물과 관련이 많다. 실제로도 ‘면천 물이 좋다’ 말은 유명하다. 면천은 조선 태종 13년에 군명으로 문헌상에 최초로 등장하고 순수한 한글 지명으로는 ‘밋내’라 불린다. 그 기원은 남원천과 순성저수지가 인근에 위치해 자연·지리적 입지환경과 지명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해안지역 읍성의 전형면천면 성상리에 위치한 면천읍성은 조선 초기 해안지역 읍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재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돼 있으며, 남문과 동문, 서문이 있는데 남문은 성문을 방어하는
면천두견주는 과거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이 원인 모를 병을 앓게 돼 면천에 내려와 휴양할 당시 제조됐다.설화에 따르면 복지겸 장군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고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의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가 지극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났고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아미산에 만개한 진달래 꽃잎과 찹쌀로 술을 빚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술을 빚은지 백일이 지난 다음 부친에게 마시게 하고 뜰에 두 그루에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 나을 수 있다는 내
향교는 조선시대에 활성화를 이뤘다. 성균관은 과거의 국립대로 본다면 향교는 지방 고등학교 정도다. 향교에서 시험을 치러 진사가 되면 성균관 진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과거에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제례의 기능만 남아있다.전국 234개 향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현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그들을 추모하고 본받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향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으며, 매월 음력 초하루 보름마다 분향을 올린다.과거 향교는 행정구역상 부, 목, 군,현
삼형제 붙어있는 모양의 바위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산신제 지내힘이 장사인 농부 박 씨가 살고 있었다. 성실한 그는 아내와 아들 셋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구와 싸우던 중 목숨을 잃게 됐다. 그 기세로 왜적들은 박 씨의 아내까지 납치해서 데려가 버렸다. 세 형제들은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됐고, 봉호산에 올라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산신령에게 매일 빌었다.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기도하던 삼형제는 추위에 얼어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눈보라 속에서 삼형제의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진다. 스쳐지나가는 고개, 바위, 길 하나에도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고 숱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지역의 전설들은 당진의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자리를 잃고 사라지고 있다. 이번 기획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많은 이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전달해 지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자 시작됐다.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 됩니다. 나이 40세가 넘도록 자식하나 낳지 못해 걱정인 원님이 있었다. 그는 자식을 낳기 위해 방법이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신평에 성 씨 성을 가진 총각이 살았다. 이 총각은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착하고 성실해 재산도 꽤나 모았다. 하지만 왜인지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성 총각은 혼인해 단란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탁발승이 “절에 가서 소원을 빌며 200일 동안 탑돌이를 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탑돌이를 한지 200일이 돼 가던 무렵, 그의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성 총각은 이것을 천운이라 느끼고 그날로 아가씨의 집까지 갔다. 그의 집은 깊은 산골에 있었고, 노파 한 명
옛날 옛적 당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채운이라는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떠나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여관을 운영했는데, 항상 손님들에게 푸짐한 식사와 친절을 베풀어 마을과 상인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하루는 마을의 부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온 식구들이 슬픔에 잠겨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 사람이 장례 중에 벌떡 일어나며 놀란 가족들에게 “채운 아가씨에게 쌀을 가져다 주라”고 말했다.그 부자의 말을 들어 보니 죽은 뒤 재판을 받던 중 옥황상제가 “채운이란 아가씨를 아느냐”며 “지금 그 아가씨의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진다. 스쳐지나가는 고개, 바위, 길 하나에도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고 숱한 사연이 있다. 하지만 지역의 전설들은 당진의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자리를 잃고 사라지고 있다. 이번 기획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고, 많은 이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전달해 지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자 시작됐다. 교로리 왜목 해변가에 명포수 해동 동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자는 꿈을 꾸게 되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내일 정오 왜목 앞바다에서 연평바다를 다스리는 청룡과, 왜목 앞바다를 지키
겹겹이 둘러싼 산과 언덕들 사이에 위치한 대치리는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큰 고개’라는 뜻의 대치리에는 한티고개가 자리잡고 있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한티고개를 넘어야만 면천면 중심지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대치리의 남쪽으로는 오봉산이, 북쪽으로는 옥녀봉이 위치해 있고 마을 가운데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산간 지역이다 보니 수도작 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꽈리고추나 블루베리를 비롯해 원예특작이 많이 재배되고 있어 경지면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좁지만 농가 소득은 꽤 좋은 편이다. 마을에 저수지가 없어
예부터 ‘마섬포구’라 불리던 장고항1리는 당진의 여러 포구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어촌마을이다. 하지만 최근 송산면 가곡2리 성구미포구 어민들이 현대제철 사유지에서 생업을 이어오다 마섬포구에 자리 잡으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소와 말 닮은 두 개의 섬 나란히 소와 말이 얽혀있는 형상이라는 마섬은 ‘소마’라 불리기도 하고, 두 섬이 나란히 있어 ‘쌍섬’이라고 불린다. 마섬은 밀물이 들어오면 섬이 됐다가 물이 빠져나가면 육지와 연결된다. 포구에서도 무척 가까워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 보면 어느새 섬까지 다다른다.“장고항이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당진과 아산의 경계에 있는 신당리는 평지가 대부분인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어 풍성한 어장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너른 들에서 생산되는 해나루쌀로 유명한 곳이 됐다. “바지락과 대합 등 조개는 물론이고 게, 망둥어 등 여러 종류의 해산물이 잡혔죠. 갯벌과 바다, 그리고 민물이 만나는 황금어장이었어요.” (정경채 이장)남원포와 인천을 오가는 배도 들락거렸다. 삽교천방조제를 쌓음으로 인해 예전만큼 많은 물고기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물 걱정 하나는 사라졌단다. 지금은 물이 항상 풍
너른 들녘마다 황금빛 물결이 바람 따라 넘실거린다. 대한민국 국토의 70%가 산이라는데 우강면 신촌리에서는 그 흔한 동네 뒷산 하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드넓은 평야가 이어져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뻥 뚫리는 기분이다. 쭉 뻗은 마을길을 따라 벚나무와 황금송, 주목이 번갈아 가며 심어져 있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회관 옆에 지어진 실내 게이트볼장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 함께 운동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어르신들은 무리가 되지 않는 적당한 운동량과 공을 치기 위해 집중력을 기를 수 있어 치매예방 등에 게이트볼이 최고라고
용이 솟은 자리라고 전해내려 오는 용연1통은 약 700년 전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 내려온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아미산에서 도를 닦은 용이 현재 용연공동묘지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산줄기를 타고 ‘용무출산(龍舞出山)’에서 춤을 추며 승천했다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용이 하늘로 오를 때에 한쪽에는 산이 생기고 한쪽에는 연못이 생겼는데, 그 곳은 현재 용연유치원 뒷쪽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허박사민물식당 자리에 ‘용못’이라 부르던 아주 큰 못이 있었다더군.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지만 용이 승천했던 자리라는 기록이 있어.”용못이 있던
합덕읍 창정리는 행정구역상 석우리에 포함된 마을 중 하나다. 석우리는 원석우리와 제오지리, 창정리로 이뤄져 있다.밭농사 비중 커…올해 ‘풍년’합덕읍에서는 너른 벌판에서 짓는 쌀농사가 유명하지만 창정리를 비롯해 이 일대 마을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논보다 밭이 많아 밭작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대부분 노지에서 감자나 콩, 대파 등을 기르는데, 일부 시설하우스에서 수박과 쪽파를 경작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강수량이 적고 날이 더워 수박 농사가 잘 됐다고.“올 여름 수박 농사로 재미 좀 봤지. 날이 더우니까 수박이 아주
지금은 온통 짙은 녹음으로 가득하지만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면 가장 먼저 봄의 소식을 알리는 마을이 바로 갈산리다. 갈산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아름드리 벚나무마다 연분홍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갈산천은 당진천으로 이어지는데 저녁 무렵 운동하는 시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갈산천은 당진천과 달리 산책로가 이어지지 않아 불편함이 따른다. 이 지역은 성북리에서 우두동까지 이어지는 고향의강 정비사업의 구간으로 지정돼 있어 올해 공사를 시작해 오는 2015년 하천정비가 완공될 계획이다. 당진천으로 이어지는 갈산천“해마
당진지역에서도 정미면은 조용하고 순박한 마을이다. 특히 덕마리는 산들이 마을 주변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데다 푸른빛으로 너울거리는 들판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랜 시간 터를 닦으며 살아온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어서 요즘 같은 농한기에는 마을회관 앞 정자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낸다. 굿하고 제사 지내던 말목 덕마리는 원래 서산시(당시 서산군) 땅이었으나 1957년 당진시(당시 당진군)으로 편입된 곳으로 마을이름의 유래가 된 곳은 말목과 덕실이라는 곳이다. 지금의
“거산(巨山)이라는 마을 이름처럼 산 같은 아파트가 많이 생겨나고 동네가 점점 커지고 있나벼~”삽교천 방조제 건설과 서해대교 개통으로 교통의 요지가 된 거산2리는 꾸준히 인구가 늘고 있는 마을 중 하나다.마을에만 9개의 아파트가 있을 정도로 도시화 마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거산2리는 당진과 합덕에서 신평면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수도권과 접근성이 편리한 곳이어서 젊은 세대가 많이 이주해 오고 있다.하지만 마을에서 터를 닦고 살아온 주민들과 이주민 간의 벽이 높아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인영 부녀회장은 “마을주민은 많지만
당진 지명의 유래가 된 마을이 있다. 바로 당진포리가 그곳이다. 중국 산둥반도와 매우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일찍이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당나라와 교역한 나루(포구)’라는 뜻에서 당나루, 즉 ‘당진포(唐津浦)’라 불렸다. 해안가 근처에 당진포영(領, 군대)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 앞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영전(領前)이라 불렸다.“어렸을 때 만해도 ‘영 앞’이라는 말을 쓰곤 했었어요. 친구들을 만날 때 ‘영 앞에서 만나자’라고 말했죠.” (최종웅 이장)당진포1리는 몇 해 전 농촌체험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영전황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