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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2.02.16 00:00
  • 호수 406

“베짜는 일만 60년 넘었어” - 고대면 슬항2리 박봉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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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걸루 살구 요걸루 버텼지
근디 드런 놈에 물건이 이 물건이여

일평생 한가지 일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것은 아름답다. 일평생 한가지 일을 해온 사람도, 일평생 그 사람과 함께 해온 일도 아름답다. 그리고 일평생 그 사람과 함께 일하며 그 사람의 손때가 묻은 물건은 영혼을 가진 것처럼 빛이 난다.
고대면 슬항2리 박봉순(79) 할머니의 일생은 베짜는 삶이었다. 친정인 고대면 성산리에서 열다섯 먹으면서 손에 익히기 시작한 베짜기는 시집온 뒤에도 시어머니의 가업을 이으며 계속됐다.
베짜기로 아들 셋, 딸 셋을 다 여의었고 평생 지고 살았던 빚도 이 베짜기가 아니었으면 날마다 뒷간에 쌓이는 똥처럼 하염없이 늘어만 갔을 것이다.
“그간 숱헌 베두 베고 숱헌 베두 짰어. 근디 말여. 이눔으 게 하루 죙일 혀야 10원벌이두 안뒤야. 평생을 했어두 부자두 뭇뒤었어. 배운 도적질이라구 일만 죽두룩 허는겨.”
그러는 사이 할머니의 머리는 푹신 곰삭은 세월의 느낌, 백발로 그만 뒤덮여 버렸다.
“머리가 하두 일찍 세어서 사람덜이 백골할매, 백골할매 불렀지. 근디말여. 늙어지면 고만여. 몇해 전만 해두 늙어두 멋있게 늙는다구 혔는디 지끔은 왜 이렇게 쭈그러졌느냐 그려.”
한마디로 세월무상. 하지만 할머니는 이젠 뭐 그런 게 씁쓸할 것도 없다는 무심한 표정으로 베를 ‘돌 것’에 올려놓고 돌리며 저쪽 구석에 놓인 물레를 고갯짓으로 가리키신다.
“저것두 나허구 같이 늙어가는 물레여.”
할머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할머니가 ‘돌 것’을 찬찬히 돌리는 동안 밖에는 어떤 손님인가 궁금해하던 할아버지가 와서 쭈그려 앉으신다. 할아버지(전순봉 옹, 82)가 만들어 주셨다는 ‘돌 것’은 베틀 대신 할머니가 사용하는 커다란 십자형 날개다.
할머니는 이 ‘돌 것’을 슬슬 밀어내며 잣아낸 베를 풀어 올려놓는다. 이 과정이 오기 전에 할머니는 작년 6월부터 벌써 긴 과정을 거쳤다.
“밭이서 삼을 비어다가 / 쌀가마에 걸어서 / 껍데기를 벳겨서 / 잘 말려놨다가 / 간추런히 목을 집어서 / 물에 담가서 / 쇠망치로 대가리를 뚜둥겨서 / 톱으로 째서 / 발에 널었다가 삼은 겨.”
토막토막 힘주어 지난 과정을 설명한 후 할머니는 베를 삼느라고 못이 박힌 무릎 언저리를 몸빼바지를 걷어부치고 보여주신다. 베를 무릎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비빈 탓이다.
“삼은 것은 / 잣아갖고 / 잿물에 삶아서 / 쌀겨물을 울려서 / 국을 멕인 다음 / 말려갖고 / 담가갖고 / 두번 잣아서 / 이 돌 것에 올린 거지.” “이거 허느라고 몇번을 손이 갔나 물러. 여간 손 간 게 아녀.”
이렇게 말린 베는 다시 잿물에 삶은 후 풀어내서 털 하나 없이 잘 거실려내야 한다.
“설 전이 다 잣어나 놓는다 혔더니 새 안이 될라나 물러. 한 2백자 허자면 1년은 걸려.”
“근디 말여. 이젠 늙어서 소용음써. 우리 두 늙은이 옷 꿰매놨으니 급할 것두 읍구. 어제도 어뜬 이가 베 2백자만 해달라 겨서 뭇헌다구 혔어.”
“어깨? 아프구 말구. 말헐 거 뭐 있어. 손이서 피가 다 나는 걸. 잿물이 닿으믄 손이 한꺼풀 벗어져. 그래두 해여. 그래두 내 이렇게 살어.”
할머니는 한숨 하나 짓지않고 덤덤하게, 손에서 피나는 이 짓을 그래도 한다고 하신다. 잿물이 닿으면 손이 한꺼풀 벗겨지는 이 짓을.
“내 앞가름 내가 허는 겨. 내 불어 내 사는 겨.”
“근디 말여. 이거 허면 고민이 음써. 다른 이런 거 저런 거 잡생각이 음써. 가마아니 앉아 요러고 있으면 잡맘두 읍구 치매병 피허는 것두 바루 이거여.”
“그래두 말여. 조반 먹구 이거 허고 즘슴 먹구 이거 허고 저녁 때꺼정 이러다 보믄 눈이 핏발두 서구 입두 해지구… 드런 놈에 물건이 이 물건이여. 아주, 이거 허면 입맛두 써.”
열다섯부터 일흔아홉까지 64년 동안 베를 짜온 할머니. 17년간 마을에서 부녀회장을 맡아 박·봉·순. 그 이름 석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할머니. 베짜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고대면에서도 베짜는 왕언니인 봉순할머니.
할머니에게 베짜기는 고마움이자 웬수고, 약이자 병이며 사랑이자 미움이다. 봉순할머니에게 그것은 애지중지한 ‘요거요거’고, 징글맞은 ‘드런 놈’이다. 그것은 그냥 할머니 인생이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태숙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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