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뉴스
  • 입력 2000.09.25 00:00
  • 호수 339

상록학원이 맺어준 인연 40년 - 석문면 초락도리 김원식, 전자순씨 부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게 없었다면 희망도, 고향도 없었을 거예요”
상록학원이 맺어준 인연 40년, 상록수 정신 잊지 않고 삽니다

석문면 초락도리 김원식·전자순씨 부부

우리의 50년대, 60년대는 너무나 가난했다. 입을 것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한끼는 죽, 한끼는 고구마... 어떻게든 굶주리지 않고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이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굶주리기에서 마찬가지라고 해도 그 시대를 넘기기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젊은이들이었다. 왜냐 하면 그들에겐 희망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삶과 가치에 대한 열정이 한창 뜨거울 때 생존 그 자체에 매달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그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좌절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세대는. 전쟁이 끝난 뒤 모든 게 폐허가 되고, 가뭄까지 겹쳐서 농사도 영 가망이 없었죠. 그때는 아무일에도 의욕이 없었어요. 참 대단한 고통이었죠.”
석문면 초락도리에 사는 김원식(62세)씨의 말이다. 김씨의 10대와 20대는 50년대와 60년대의 그와 같은 가난 위에서 짜여진 삶이었다.
태풍 때문에 한가위의 기쁨도 어물쩡 넘길 수밖에 없었던 서기 2000년 가을. 1960년대의 가난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김원식씨를 만나러 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심훈 선생의 상록수 정신을 계승해 이곳 당진땅에서 농촌계몽운동의 물꼬를 텄던 <상록학원 designtimesp=10643>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원식씨는 상록학원의 1기 수료생이었을 뿐 아니라 부인 전자순 여사는 2기 수료생으로 수료생끼리 결혼한 특별한 경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귀동냥으로만 들어온 상록학원과 청년계몽운동의 실체를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록학원은 우리가 대책없는 가난과 무기력에 허덕이고 있던 1960년경, 신평면 매산리 출신의 김형환씨등 20대 청년들이 농촌재건을 위해 청년계몽 교육을 펼쳤던 당진의 비공식 교육기관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공동체였다.
이 당시 1개면에서 2~3명씩,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청년들을 소집해 결성된 상록학원 공동체는 40일간 집단숙식을 하면서 무기력에 빠진 자신들을 채찍질하고 선각자들을 모셔다 강의를 들었으며 마지막 일주일 이상은 몇 안되는 주변 고을의 선진농가들을 직접 찾아가 산 교육을 받았다.
김원식씨의 뇌리에는 이 당시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스물 네살 때였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경건의 시간이라는 명상을 하고 구보와 운동과 체조를 하며 틈만 나면 힘차게 노래를 불렀어요. 식사 후에는 날마다 강의가 있었는데 정신과 의식을 개혁하는 정신교육과 농사기술교육이 있었죠. 당시 그저 땅에 심으면 농사라고 생각해온 우리들에게 과학적인 농사라는 것 자체가 놀라운 발견이었어요.”
김원식씨에게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경남에 사시는 한 목사님이 가르쳐준 고구마 재배법이다. 고구마 줄기에 일부러 자극을 주어서 싹이 많이 트게 하여 열매를 많이 맺게하는 것으로 식량증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동체 생활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각자 자기의 개성을 진단하여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나가기 위한 성찰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타인, 그리고 국가와 사회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백리 길, 오십리 길을 걸어 현지 선각자들을 찾아다녔죠.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운산에서 벌써 공원을 조성해 놓았던 박문씨를 찾아갔을 때 그분이 해주신 말씀이에요. 누구에게나 자기의 길이 있는데 누구의 길 할 것 없이 거기에는 돌도 있고 구덩이도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는데 늘 돌과 구덩이를 탓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돌이 있고 구덩이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자신에게 없다는 게 진짜 문제라는 걸 모른다는 말이죠.”
이 상록학원에서 받은 수업료는 40일간 쌀 한말이 전부였다. 자신들이 먹을 식량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그걸 내기가 수월치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나머지 상록학원의 운영은 뜻밖에도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상록학원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어서 라디오와 TV방송까지 탔다. 사회적인 후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원식씨가 말하는 상록학원의 의미는 한마디로 <지독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발견한 놀라운 희망 designtimesp=10653>이었다.
“상록학원을 거치며 갖게 된 생각은 우리에게도 살 길이 있다는 희망이었어요. 나도 이제 이 사회에 씨앗이 되어보자, 그런 각오도 생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록학원은 이곳에서 주도적으로 일했던 김형환씨가 대학 입학을 위해 당진을 떠나면서 2기 여성반 교육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김원식씨도 교로리에서 신평면 한정리로 옮겨 새생활을 시작했다. 상록학원을 통해 관계가 돈독해진 전 여사와 결혼도 하였다.
그 뒤 인생의 궤도를 반바퀴 넘게 도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김씨부부도 서울생활을 하다 지난 1991년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아들 삼형제도 모두 명문대를 나와 자리를 잡았다. 김씨부부는 현재 석문면 초락도리에서 배과수원을 하면서 마을 이장일을 보고 있다.
부인 전자순 여사는 말한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틀리진 않지만 그때 배운 것이 토대가 되어서 남에게 불편 안주고, 검소하고, 바르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요” 라고. 이집은 외제 물건은 커녕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아들 결혼식 때에도 예단을 모두 생략했다. 이 모든 게, 심지어 다시 고향에 다시 내려온 것도 상록학원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김씨 부부는 자신있게 말한다. 오죽하면 큰아들 용상(37세)의 어릴적 이름이 상수일까. 상록수에서 가운데 ‘록’자만 뺀 것이다.
김원식씨는 당시 가슴 벅차게 새벽마다, 틈이 있을 때마다 불렀던 노래 소절을 지금도 기억한다.
허물어진 조국강산 다시 세우려 / 우리들은 괭이 메고 일어섰노라 / 힘차게 검은 흙 파서 헤치며 / ......
상록학원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길이 있다는.


김태숙 부장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