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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3.09.22 00:00
  • 호수 483

자유로운 魂, 魂의 소리 - 당진 경기민요연구소 최은영씨 - 홍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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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자유자재로 놀며 경쾌한 울림을 주는 민요를 소중하게 여겼으면

당진 경기민요연구소 최은영씨


아니 - - 아니 - 노지는 못하리라
잊어라 꿈이로구나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옛날옛적 과거지사를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나를 싫다고 나를 마다고 나를 버리고 떠난 임을 잊어야만이 옳을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어리석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못잊어 한이로다
「창부타령 중」



들창으로 무연히 찬 비 들이치는 오후. 지그시 감은 두 눈에 쪽진 머리를 하고 빗소리에 장단을 맞춰가며 물 불어나듯 음을 풀어놓는 가인(歌人). 끊어질 듯 이어졌다가 그윽하게 퍼졌다가 가파르게 오르는가하면 내려 닿고 웅얼거리다가는 어느새 휘몰아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소리를 종종 하셨던 걸 기억해요. 그걸 듣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흥얼흥얼 따라 부르면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지요.”
당진문화원에서 3년째 민요강좌를 지도하고 있는 최은영(본명 최문순, 52세)씨.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 소리를 만났지만 늘 어머니가 못마땅히 여겨서 부모님이 다투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미련만 남기고 하는 수 없이 뒷전으로 물리게 되었지만 결혼 후에도 소리는 마음을 점점 잡아끌었다.
이런 속앓이를 풀어준 사람이 바로 대감놀이의 일인자 고 지연화 선생. 그러나 본격적으로 경기민요를 사사 받게 되자 지연화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어 배움은 이은주(중요무형문화제 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선생에게, 그 후 다시 묵계월(중요무형문화제 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선생에게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오래 살면서 민요를 배우던 동료들과 공연도 많이 갖고 여러 활동을 하며 지냈어요. 고향은 전남 영암이지만 당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이곳으로 시집 온 두 여동생들 때문이기도 하지요.
최씨는 지난 3월 시장오거리에 경기민요연구소를 개설해 당진지역에 미진했던 국악을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은 주로 40∼70세. 소싯적 한 두 번쯤 지방을 떠도는 가객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있을 법한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최씨는 아주머니들이 비교적 이해가 늦기 때문에 칠판에 부호 등을 적어 알기 쉽게 가르치는 방법을 택했다. 개개인의 인식능력 차이를 고려해 단계별로 가르치는 교육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 끝에 터득하게 되었다.

“저의 재산 목록 1호는 바로 20년전 노트예요.”
최씨는 처음 지연화 선생에게 경기민요를 사사 받기 시작하던 1981년 무렵부터 꼼꼼히 메모해 둔 조그만 노트를 지금껏 소중히 간직해오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주부대학교본·경기민요』(1994)라는 책을 집필해 사설 등을 정리, 어렵고 별개의 분야로만 생각해 오던 민요를 일반인들도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정립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어머니에게서 다시 딸로. 입으로 입으로 구전되는 민요들은 대부분 세월의 정거장처럼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하기에 최씨는 이를 오래도록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래서 특히나 최은영씨는 스승인 묵계월(83세) 선생의 건강을 늘 기원한다.



경기민요는 서도나 전라민요에 비해 맑고 깨끗하며 경쾌하고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아리랑·군밤타령·노랫가락·는실타령·닐리리야·도라지타령·방아타령·베틀가·오돌독·창부타령 등이 이에 속한다.



취재 당시 당진읍 승격 40주년 기념행사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회원들과 최씨가 한참 분주한 모습이었는데 이런 선생님을 돕는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 눈에 띄었다.
“6살 때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마땅한 학원이 없어서 그동안 배우지 못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이곳을 아시고 난 뒤에 저를 보내주셨는데 무척 재미있고 잘 가르쳐주세요. 선생님도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니 편하구요.”
장래 가수가 꿈인 당진중학교 3학년 안선희 학생은 평소에 노래부르기를 즐겨했는데, 이 연구소에 들어온 것이 마냥 신이 나는 듯 얼굴이 밝아 보였다. 선희 학생은 어른들과 함께 이번 기념행사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연구소에 나와 춘향가를 연습한다.
“서울은 찾아오는 수강생들이 훨씬 많고 또 열정도 여기와 비슷하지만 정이 없어요. 일시적이고 물질적으로 고마움을 갚으려는 사람들뿐이죠. 그렇지만 이 곳 회원들은 집에서 손수 담근 김치라든가 소박한 음식들을 가져와서 두루두루 나눠요. 서울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점 중의 하나죠.”
그렇지만 최씨는 작은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사적인 감정대립이 나타난다며 불편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분열이 당진 국악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동안 소망의 집, 평안마을 등의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무료로 봉사해온 그녀는 앞으로 많은 노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돕고 싶다고 말했다. 노인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읍면에 자신이 직접 가르친 어머니들을 보내 노인들에게 민요를 접하게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돈벌이보다는, 점점 외면되는 전통국악의 맥을 이어가는 노력이 더 우선이에요.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래민요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무척 가슴이 아프죠. 문화원에서 민요강좌를 하고 있지만 단 하루 몇 시간에 불과해요. 그럴 때 금방 헤어지기보다 연구소에 와서 민요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정담도 나누며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의 몸에서 나는 깊고 부드럽고 큰 울림. 어디선가 옛 우물처럼 비밀스런 가락이 빗금을 그어대는 공중으로 굽이굽이 새어나온다.

홍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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