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18 13:58 (목)

본문영역

[칼럼] 어느 70세대의 독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 금 구
합덕대건노인대학 학장



내가 50년전에 장가들고 부모 집에서 분가해 나온 곳이 지금 사는 바로 그 집이다. 그동안에 변했다면 초가에서 스레트로 지붕을 개량했고 몇년 전에는 칼라 함석으로 지붕을 바꿔 씌운 것 뿐이다.
흙벽돌로 둘러 친 방의 벽은 몇 번이고 내 손으로 시멘트를 발라놓아 두께도 퍽 두꺼워졌으나, 방한, 방온, 방습의 효율도 꽤 높다.
아쉬움이 있다면 방문이 낮아 작은 키에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불편이 있고 창문이 작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금년 추석명절에도 외지에 사는 아들 사형제들이 전부 모였다. 며느리 손자 손녀 14명과 우리 내외까지 16명이 좁은 집(방 두 개)에서 난리가 났다. 마치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다. 손자 손녀(6명)들이 울고불고 엉키고 뛰어 놀면 작은 집이 시끌벅적 하다.
“쇠는 쇠에 매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 진다”
추석 명절날 태풍 매미가 상륙해 제주도를 비롯 남쪽의 부산, 마산 등을 휩쓸고 지나갔다. 피해지역은 마치 이라크 전쟁터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방영됐다. 뜰이나 논이나 밭, 집 등이 흙탕을 쓰고 제멋대로 널부러졌다. 쌀농사를 짓고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올 농사 다 망쳤구나! 그런데 우울한 마음에 부채질 격으로 더 큰 사건이 터졌다.
멕시코 칸쿤 WTO 각료회의장 마당에서 한국의 농민 이경해씨가 자결했다. 거리에는 이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만장이 나부낀다. 검은 글씨의 만장은 이경해씨의 명복을 비는 간절한 글귀로 보는 이들을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다.
이경해씨의 죽음의 뜻을 누가 바로 알 것인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은 천길 물 속과 같아 슬기로운 사람만이 그것을 길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가하면서 부모 물림 논 천평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큰 놈과 둘째 녀석은 어렵게 중학교만 졸업시키고 도회지로 보냈고 셋째 녀석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막내 아들은 도회지로 간 형들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논 천평이 3천평으로 늘어났다. 70 중반에 이른 나이에도 나와 내자 둘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연간 농사비용을 다 떨고나면 6백여만원은 손에 들어온다. 일년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 농협에 다른 채무가 없으니 얼마간의 금액을 예금했다. 젊은 사람들의 2개월 봉급도 못되는 돈인 것을 알면서도 수확이 끝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류관은 세종때 우의정을 지냈는데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베옷과 짚신으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 어느 여름 한달 이상 내린 비로 지붕이 줄줄이 새자 류관이 우산을 들고 부인에게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겠소?”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우산이 없는 집엔 다른 마련이 있답니다.”
나는 가난하면서 엄하셨던 아버지의 만류로 초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를 거들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에서 지척의 거리에 초등학교가 새로 들어섰다. 넓은 운동장에 놀거리도 많아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갔는데 하루는 학생들과 휩쓸려 교실에 들어갔다. 그것이 계기가 돼 아버지가 입학을 허락하셨으니 남보다 2살이 더 많은 나이에 1학년이 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자의 학력자가 된 것이다. 나의 유년기인 일제 강점기나 광복 후 청·장년기나, 노년이 된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가진 자는 베풀지 않고, 힘 있는 자는 무서운 존재이고, 배운자는 교만하다.”는 사실이다.
세계무역기구에 의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쌀 개방 문제의 유예기간 10년이 금년으로 끝이 난다. 이번 칸쿤 각료회의에서 결말을 도출하지 못했다 해도 내년부터는 직접 당사국 간의 농산물, 특히 쌀 문제의 협상이 이뤄지게 되었다. 앞으로 쌀 주요 수출국인 미국, 중국, 태국 등 국가와 협상을 벌여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국가에서는(정부)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10년이란 세월 동안 어떠한 정책을 펴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우리 농촌에는 이렇다 할 방안도 없었으니 가슴만 답답답할 뿐이다.
정부여! 정치인이여!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씨의 영전에 어떤 면목으로 분향과 헌화를 한단 말이냐?
내 막내아들은 대학을 졸업해 은근하게 녀석에게는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공무원 9급 시험쳐서 면서기가 된 지 5년이 넘었다. 그놈의 삼촌인 내 아우는 시골 초등학교만 나와서 면서기 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나는 천평의 논에서 지금은 3천평으로 늘어났다.
나같은 노령 농부들은 거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즉 정부에서 획기적인 농업정책을 사용해 외국 농산물과 대응할 수 있는 농업정책이 마련되어 있고, 또 논이 필요해 정부에서 사겠다면 팔 수 있다. 아니 팔겠다. 대금은 일시지불이 아니더라도 좋다. 연금식으로 월 얼마씩 우리 내외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까지만 지불하면 된다. 그 후에는 국가에 귀속해도 좋다.
보석은 비록 작아도 값지듯이 작은 평수의 논도 값지게 활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정부와 정치인들이다. 여론과 공론에만 매달리지 말고 농민이 살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을 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