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노을 속으로 가는 시간
유하
비가 세상을 내려앉히면
기억은
노을처럼 아프게 몸을 푼다
부리 노란 어린 새가 하늘의 아청빛 아픔을
먼저 알아버리듯
어린 날 비 오는 움막이여,
왜 노을은 늘 비의 뿌리 위에서
저 혼자 젖는가
내 마음 한없이 낮아
비가 슬펐다
몸에 달라붙는 도깨비풀씨 무심코 떼어내듯
그게 삶인 줄도 모르고
세월은 깊어서
지금은 다만 비가 데려간
가버린 날의 울음소리로 비 맞을 뿐
아득한 눈길의 숲길, 말들의 염전
시간은 길을 잃고
나그네 아닌 나 어디 있는가
추억을 사랑하는 힘으로
세상을 쥐어짜
빗방울 하나 심장에 얹어 놓는 일이여
마음이 내려앉아 죽음 가까이 이를 때
비로소 시간의 노을은 풀어 논 아픔을 거두고
이 비의 뿌리 한 가닥
만질 수나 있을 것인가
․196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세종대 영문과를 졸업
․1988년 문예중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무림일기」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등이 있다.
․1993년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연출
․현재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석사과정에 있음.
21세기․전망 동인으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