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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0.05.15 00:00
  • 호수 322

걸어라 원희야, 푸른 너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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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라 원희야, 푸른 너의 세상을

열한 살의 꿈 “엄마 아빠, 올해는 걸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원희는 자신과 같이 몸이 불편한 장애인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얘들아, 포기하지 마. 포기하는 것은 자기만의 세상을 잃어버리는 거야.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
엄마 아빠의 끝없는 사랑과 화목함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도전 속에서 원희의 마음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것이 바로 원희가 말하는 자기만의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원희는 올해 열한살, 초등학교 4학년생이다. 여느 아이들처럼 잘 웃고 잘 놀고 배우는 일에도 열심이다. 반 투표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로 반장에 당선될 만큼 인기 또한 ‘캡’이다. 그것은 원희가 남을 잘 배려하고 즐겨 돕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이 볼 때 원희의 다른 점은 원희가 잘 걷지 못한다는 것 뿐이다. 맞다. 원희는 휠체어를 타고 특수워커를 신고 다닌다.

원희는 갓난아기 때 발육이 늦고 자주 앓아서 매일 소아과 병원 문턱을 넘어다녔다. 하지만 만 1년이 될 때까지 아무도 원희의 이상증세가 뇌성마비로 인한 것임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 대한 검진은 일반화 되어 있지 않았다.
걱정은 좀 되었지만 아빠처럼 그저 발육이 남보다 더딘 것이려니 했다. 누워있긴 했어도 6개월 되던 때부터 말을 똘똘하게 잘했던 원희. 예쁘고 어디하나 비뚤어진 데 없는 원희를 보면서 뇌의 어딘가에 손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젊은 엄마 아빠에게 첫딸 원희의 병은 마른 하늘에 치는 날벼락보다 더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 충격보다 힘들었던 것은 어린 원희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어렸을 때의 그 알아차릴 수도 없는 미세한 차이는 원희가 커가면서 점점 다른 아이들과의 신체적인 차이를 벌려 놓았다.

토목기술자로 중견회사에 다니며 미래가 창창했던 원희 부모, 정봉채(41세)·김민재(37세)씨 부부는 그 순간부터 원희를 ‘위해’ 살았다. 모든 계획이 원희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계획이 변경되더라도 그것은 원희를 위한 것이었다.
원희가 첫 돌을 맞았을 때 아빠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당진으로 내려왔다. 서울의 회사원 생활로는 원희의 치료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종형과 중장비를 부업으로 다루면서 건설현장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지금 그는 한국도로공사가 건설중인 서해안 고속도로 제1공구 현장소장으로 있다. 원희아빠는 휴일도 없이 매일 현장으로 나간다.

원희의 병원치료를 위해 남편과 떨어져 살던 엄마도 당진으로 내려왔고 그 사이 동생 민지(현재 7세)도 태어났다. 엄마의 하루는 민지를 돌보고 원희의 이동을 돕느라고 스케줄이 빽빽하다.
엄마와 함께 원희는 요즘 월요일·금요일에 장애인복지회관에서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재활운동에 참여한다. 그곳에서는 신성대 물리치료과 오태영 교수가 6명의 아이를 자원해서 치료해 주고 있다.
화요일이면 원희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水)치료를 받는다. 물 속에서 수영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치료다. 그냥 놔두면 뼈가 서서히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기 때문에 이렇게 애를 써야 한다. 처음부터 다리를 사용할 줄 몰랐던 원희에게는 기는 자세도 일일이 가르쳐야만 했다.

원희를 위한 엄마 아빠의 이런 노력은 원희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원희를 홀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원희는 정말 잘 자라주었다. 원희가 구김살없이, 의욕있고, 당당한 아이로 자라준 것이 엄마 아빠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고 행복이다.
왼손을 버릇처럼 자주 쓰는 것이 조금 걱정이었지만 이젠 아빠가 마련해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인터넷 자료를 찾아 멋드러진 숙제를 한다.

자식을 낳아 키워본 사람은 원희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다. 세상에 태어난 축복대신 고통과 불행을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장애인 자녀들 속에서 이처럼 원희를 맑게 키우기까지 그 부모가 지금껏 짊어진 속내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지금은 시골 작은학교에서 놀림이나 불편함없이 지내지만 이제 머지않아 넓은 세상에 나가야 하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사춘기도 지나야 한다. 원희 부모의 조바심은 끝이 없다. 이미 유치원과 초등학교 입학 때 읍내학교에서 차가운 거절을 경험한 원희가족에게 이 사회는 너무도 문턱이 높았다.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문턱을 낮추는 것, 이 사회와 사람들이 장애인을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할 뿐 똑같은 존재들임’을 알아주는 것이 원희 부모의 간절한 바램이다.
원희 덕분에 사회학자가 다 된 원희아빠는 “가정이건, 사회건 장애아들에 대한 초기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나중의 손실과 고통을 줄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빠는 단 한번 짜증내거나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원희에게도, 힘든 엄마에게도 이보다 더 큰 위안은 없다. 장애를 안고 사는 원희가족은 아마도 이 세상을 다 안고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사정의 허락과 주위의 관심과 사랑. 이것이 원희에게 얼마나 특별한 혜택인지 이 가족은 잘 알고 있다.

원희는 오늘도 도전한다. 며칠 전에는 아빠와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아미산도 정복했다. 또 엄마와 헤어진 사이에 수백미터나 되는 거리를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떡볶이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날 엄마는 원희를 찾느라 등줄에 땀이 났지만 원희는 기쁜 성취를 맛보았다.
원희의 꿈은 판사나 의사가 되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제도적으로, 의료적으로 얼마나 이 사회의 문이 좁은지 원희는 이미 알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원희 스스로 개척할 몫이다.
올해 원희는 “걷기로” 목표를 정했다. 며칠전 어버이날 원희는 이렇게 엄마 아빠께 편지를 썼다.
“...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안스러운 아빠,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엄마, 두 분의 깊은 사랑 덕에 저는 이렇게 잘 자랐어요. 엄마 아빠, 올해는 제가 꼭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사랑해요...”
김태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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