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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한약을 말살하는 현재의 한약제도
2012년 10월 18일 () 15:29:08 김윤경 mjmedi@mjmedi.com

   

김  윤  경
원광대 한약학과 교수, 한의사

지난 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SO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 국제표준화기구) TC249 위원회의 두 번째 Working Group인 한약제품(Herbal Product) 분과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그룹의 의장을 맡고 있는 독일에서는 안전성과 품질에 대한 표준제안서에서 이 분과에서 다루는 한약제품들을 <그림>과 같이 분류하였다.

한약제품 분류의 세계적 추세
이 분류는 한약제품을 3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분류는 의약품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한의사들의 처방에 의해 사용되는 탕제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분류는 전통적인 물 추출물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현대적인 여러 제형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전통적인 문헌근거를 활용할 수 있는 한약제제를 말하는 것이며, 세 번째 분류는 현대적으로 새롭게 개발되어 근거자료가 필요한, 새로운 용매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배합을 개발한 천연물신약과 같은 한약제품을 지칭하고 있다.

중국은 한약제제에 해당하는 중성약 제도와 중약신약에 해당하는 제도가 있다. 물론 분류마다 허가에 필요한 근거자료와 검사항목은 다를 수 있으며, 이 그룹에서는 이와 관련된 표준을 개발할 예정이다.
이 회의에 참석한 독일, 미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남아공, 중국, 일본, 한국의 9개국은 각국마다 약간씩 다른 한약관련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 분류를 인정하여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이 중 3번째 분류인 새로운 제제들을 천연물신약으로 별도 분류하여 한약재를 사용하며, 기성한약서의 자료들을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한약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컨센서스에 반하여 홀로 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통의학 강대국의 장점 못 살려
바로 한의사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흔치 않게 전통의학 시술자를 의사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과 한국이다. 그러나 서양의학(Conventional western medicine)이 아닌 보완대체의학이 각광을 받게 되면서 세계적으로도 관련 시술을 하는 인력의 교육과 자격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 2006년 11월 밀라노에서 개최된 WHO Consultation on Phytotherapy 회의에 참석하여 관련 직종의 교육에 필요한 내용을 자문한 바가 있으며, 이 내용은 2010년 ‘Benchmarks for Training in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WHO에서 출판되었다.

이미 전통의학에 관련된 전문직종인 한의사와 한약사 면허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대학교육제도와 석·박사학위과정으로 교육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제도의 선구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되며, 한국의 제도를 이용하여 전 세계의 전통의학에 관심 있는 인력을 불러들여 교육시키고자 하여도 될 만한 일이다. 중국은 이미 자국의 중의약제도를 이용하여 대학과 관련 산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세계시장의 패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상황은 이원화된 제도를 확립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전 세계적인 붐을 타고 한의약에 관심을 가지게 된 다른 보건의료인들이 해외제도에서는 의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에서는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되자 한의사와 한약사를 무력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천연물신약제도
한약을 현대적으로 연구하여 약리학적인 효능을 입증하고 현대적인 제제로 만드는 일은 한의계의 숙원이었다.
그러나 본래 탁솔이나 타미플루와 같이 천연물에서 유래한 단일성분 신약을 지칭했던 천연물신약이라는 제도를 한약인 애엽, 견우자, 구척 등의 한약재 복합추출물을 현대적으로 연구하여 의약품화 하는 데 변형하여 이용하고 있으며, 이 현대화, 산업화된 결과물들은 한약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야만 이원화 체제 하에서 의사대상으로 시장이 커진다고 보는 것이다.

한약은 「동의보감」 등의 옛 문헌에 기재된 탕제여야만 하며, 아예 한의사나 한약사는 약사법상 일반의약품/전문의약품을 처방/조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 결과 한의사/한약사는 일반/전문의약품인 한약을 사용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며, 한의약 연구자들은 한약을 연구하면 할수록 한약이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약을 조선시대에 묶어놓고 현대적 한약으로 독자적으로 연구 발전시키면 양약이 된다고 하는 현 한약제제와 천연물신약 제도는 한약의 발전을 가로막으며 한약을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독자발전이 불가능한 학문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한약제품을 만들기 위해 한의사/한약사의 전통의약인 한약을 없애 버리고, 한약에 천연물이라는 이름을 붙여 천연물신약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쓰고자 하는 것은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약의 효능이 입증되고 의약품으로 개발될수록 한약의 범주는 줄어들며 주체가 되어야 할 한의사/한약사는 고사하게 된다. 한의사/한약사라는 전문인을 배제하는 천연물신약 제도가 과연 제대로 될 수 있을까? 지금의 천연물신약은 천연물화학보다는 한약방제학과 관련 있다.

의사가 학문에 기반한 선택으로 천연물신약을 사용할 것인가? 한의사를 고사시키고 천연물신약산업을 발전시킨 후 다시 외국에서 통합의학을 수입하여 의사에게 천연물사용 교육을 시킬 것인가? 우리나라가 한의약의 선진국으로 한약의 전통적인 사용경험을 현대적인 한의약품 개발에 활용하고 한약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한약관련 전문직을 존중하여야 한다.

중국보다 발전된 한약 선진국 발돋움 기대
한의사들도 한약의 현대화를 원한다. 심지어 한약사는 한약의 현대적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직종이다. 그동안 제도가 뒷받침해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문인들은 한약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신바로나 레일라정 같은 경우는 한의사의 한약처방에 기인한 천연물신약 제품이다.

한약의 현대화, 제품화를 추진한다면 한의사/한약사를 존중하고 함께 논의해야 한다. 산업발전을 위해 시장을 키워야 하며, 관련 제도가 미비하다면 갖추어 가면서 추진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내 제약산업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 아래 전문인이 모르는 사이에 강탈하듯이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의약계와 관련 산업계가 공동으로 머리를 맞대고 현대적인 한약제품들을 발전시켜 전통의약시장을 선점하고 중국보다 발전된 한약의 선진국으로 한국이 명성을 떨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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