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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입력 2001.01.22 00:00
  • 호수 355

[절망에 쌓인 농촌]“땅팔아 빚갚고 고향 뜨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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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하우스, 절망에 쌓인 농촌

“땅팔아 빚갚고 고향 뜨는 수밖에…”

정미면 수당리 시설채소단지
96년 부농 꿈꾸며 15농가 하우스 지어
13억 투자한 시설 폭설로 하루 아침에 ‘와르르’

“지은 빚만도 수천만원인데 또 빚얻어 복구하라니…”

“국민세금 수천억 빼돌려 선거자금 쓰는 정치권,
농민구제엔 왜 그리 인색한가”

“정부돈 떼먹을순 없으니 땅팔아 빚갚고 고향 뜨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지난 7일 쏟아진 폭설로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비닐 온실을 쳐다보며 농민 정순호(정미면 수당리)씨가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다.
1,200평에 이르는 정씨의 비닐 온실은 이번 폭설로 자재 하나 건질만한 것 없이 완전히 무너졌다. 두께가 5㎝도 더 되어 보이는 두꺼운 철재파이프가 눈의 무게에 짓눌려 엿가락처럼 휘어졌으며 얼어붙은 눈을 안은 채 다음달 꾀리고추묘를 정식하기 위해 곱게 갈아 놓은 땅위로 주저앉아 있었다. 밖에서 보기엔 별것 아닌 것 같은 하우스 농가의 피해가 간신히 출입구를 열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심각성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비닐하우스는 열흘이 넘도록 철거되지 못한 채 상처입은 피해 농민들의 심경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정씨를 비롯, 이 마을 15농가가 하나같이 이같은 피해를 당했다.
경지면적이 적어 달리 소득원을 찾지 못했던 이 마을 40~50대 농민들은 지난 96년 부농은 아니더라도 자식들 학비걱정은 덜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시설채소농사에 뛰어들었다. 정부보조를 포함, 모두 13억원을 들여 농가당 작게는 3백평에서 크게는 1,200평 규모의 첨단 하우스를 지었다. 하우스안에는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이중커텐과 온풍시설이 되어 있다. 단지 대표를 맡고 있는 정씨는 태양열 지중난방시설까지 없는 것 없이 다 투자해 놓은 상태다. 시설비만 2억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1년에 두작기씩 꽈리고추와 오이를 번갈아 재배한지 만 4년째. 시작할 당시만 해도 리터당 230원이었던 농업용 면세유는 그 사이 460원으로 갑절이나 올랐고 비닐값 등 각종 자재비도 크게 올랐지만 채소값은 이들의 기대에 못미쳤다. 전국적으로 시설채소가 과잉공급 상태였기 때문이란다. 지난해에는 기름값도 못건질 정도였었다고 한다.
“기왕 투자했으니 차차 나아지겠지 기대하며 한해 두해를 보냈습니다. 태풍 불면 바람에 날아갈까, 비가 오면 주저 앉을까 노심초사 해가며 하루도 맘 놓지 못하고 지켜왔는데…”
그 많은 태풍 모두 견뎌줬던 하우스가 이번 폭설엔 대책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 마을 시설채소 농가들이 융자받은 시설비는 모두 6억5천만원. 3년거치 7년 상환조건이었으니 지난해 첫 원금상환에 들어간 상태였다. 앞으로 6년간 빚을 갚아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같은 재해를 만난 것이다.
“이제 막 기술배워 제대로 농사 지을까 했더니… 저야 늙은 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창 돈 들어갈 시기에 이 난리를 당한 젊은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혼자서 3백평을 짓는다는 이 마을 이상연(67세) 할머니는 자신도 하우스가 모두 무너졌지만 되레 젊은 사람들을 걱정했다.
대학생 둘에 대학원에 다니는 자녀까지 두었다는 유영호(55세)씨는 “아이들 등록금만 올해 천만원이 나왔다”며 “시설농사로 근근히 학비를 대왔는데 그나마 물거품이 됐으니 이젠 휴학시키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며 한숨 지었다.
“우리 마을은 지난 95년 농사까지 포기하며 공원묘지 반대싸움을 벌였었습니다. 한해 농사를 거르다 보니 마을이 많이 황폐화 돼 당진군의 배려로 시설채소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농사채라고 해봐야 논 몇마지기씩 있는게 전부여서 시설농사에 사실상 모든 기대를 걸었었죠.”
정제훈 이장의 말이다.
“제가 이장을 보고 있긴 하지만 정부에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호주머니에 있던 수첩을 꺼내 보인다. 수첩에는 지난 여름 태풍 프라피룬 때 조사한 피해 농가 현황이 꼼꼼이 적혀 있었다.
“재해 때마다 죽어라 피해조사해서 올리지만 나오는 게 뭐가 있습니까? 이 농가들 지금까지 보상 한푼 받은 것 없어요.”
무너진 정순호씨 하우스 한켠에 모여 있던 피해 농민들도 정부의 비현실적인 재해대책에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20% 보조는 앉아서 죽으라는 얘깁니다. 현재 안고 있는 빚만 해도 수천만원씩인데 60%를 융자받아 복구하라는 건 부채만 더 늘리라는 얘기 아닙니까.”
정부에 대한 성토에 이어 난데없이 정치권으로 화살이 돌아가면서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국민세금 수천억원을 자기들 선거자금으로 빼돌려 쓰면서 피해 농민들 구제에는 왜 그리 인색합니까? 선거 때는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던 사람들, 피해현장 한번 와서 들여다 보는 꼴을 못봤어요.”
“자기네들끼리 싸우기가 바쁜데 이런 곳에 오겠어?”
“앞으로는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도 그냥 안둘거유.”
그러나 이러한 분노도 당장 닥친 눈앞의 현실 앞에서는 한낱 화풀이에 그칠 뿐이었다.
“무너진 구조물 철거할 일도 큰일입니다. 연동하우스는 재활용도 불가능해요. 전부 절단해서 고물상에 넘기는 수밖에 없는데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정제훈 이장은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질 않는다”며 “재해지구로 선포해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지금 상태에서 다시 일어설 농가는 한명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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