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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당진농협 대의원 당진군청년연합회 역대회장단 감사 최경용 "老兵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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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젊음은 논밭에 묻혀있다. 아버지는 동트는 새벽부터 땅거미질 때까지 논갈이, 밭갈이에 여념이 없었다. 황량한 맨땅을 몇년동안 삽과 지게로 수마지기의 논으로 만드는 분이 아닌가. 고된 노동으로 손바닥은 나무껍질 마냥 거칠거리고 손등은 늘 퉁퉁 불어터져 있었다. 그뿐인가. 아버지는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시대 누군들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았겠느냐만, 아버지도 전형적인 농촌, 당진의 무수동에서 가난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편모슬하에서 어린나이에 대가족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 비참한 와중에도 학문에 열중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전답을 일구시며 삶을 살아가던 중,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에 입대하여 초급장교의 단기교육을 받고 최전방에 투입되었다, 아버지는 생사를 가르는 살육의 현장에서 생환하신 조국수호의 자랑스런 참전용사인 것이다.
 남북 통틀어 150만명 사망 또는 실종, 200여만명의 부상, 미군 포함 4만여 유엔군 사망 또는 실종, 10만여명이 부상당했던 민족 최악의 참상은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가 힘이 없고 국민이 무지몽매함에 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한 분단과 전쟁, 보수든 진보든, 야망이든 이제는 그만 싸움을 멈추고 성숙한 미래를 위해 애써야 할 때라고 아버지는 귀가 아프도록 말씀하셨다. 또 아버지께서는 참전 당시 형제가 형제를 죽여야 하는 이 비참한 전쟁이 괴로웠으나, 하루라도 빨리 종전시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했노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방도는 없었으리라. 참전한 국군장병 또한 전쟁의 피해자인 셈이다.
 아버지는 60년대 바쁜 시간 쪼개어 재향군인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셨다. 헌 신문조차도 버리기가 아까워 메모지로 사용하다가 붓글씨 연습지로 쓰다가 작게 오려서 변소로 가져가시던 아버지였다. 그렇게 지독스러워 시간이 곧 금이라 여기는 아버지께서 시간을 내어 봉사하심은 격전당시 한 부대를 이끌던 장교로서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애국수호의 신념이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노환으로 자신의 소중한 옛 기억조차 차차 흐려지고 있지만 얼마전 이 말씀을 또렷이 하셨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신 백범 김구 선생은 그의 일지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공원의 나무를 꺽는 자유가 아니라 심는 자유라고 하였노라고. 저물어가는 인생길에서도 모국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이 마음, 인생이란 험난한 격전지에서 겪으며 얻은 삶의 정수를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아닐까. 병으로 몸은 무기력할지언정 인생의 백전노장, 아버지는 늘 나라의 평안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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