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나는 일찌감치 객지에 나가 떠돌다가 스무살 되던 해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땅 한평도, 장사 밑천 한 푼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장면집 배달부일 아니면 시장에서 100원에 3개 하던 밀가루 빵을 사다가 150원을 받고 되파는 일 등등 이었다. 그러다가 월세 가게를 얻어 빵집을 차렸고 만화가게를 하기도 했다.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인문당이라는 가게를 하기도 했고 생활잡화를 취급했다. 미장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보일러 놓는 일을 하기도 했고 연탄숯 장사를 할 땐 새벽 4시에 가게문을 열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친 나의 20.30대는 한마디로 전쟁이었다. 계림여관(지금의 금계여관자리) 계단 아래 1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 방을 들여 집사람과 큰아이 셋이서 살부대끼면 살았던 날들. 한 사람이 똑바로 누우면 다른 한사람은 모로누워 칼잠을 자야 했던 때. 서로가 안타까운 마음에 밤새 교대로 칼잠과 단잠을 자던 그때가 이 사진들을 보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첫 번째 사진은 1970년도, 세를 얻어 어머니와 함께 운영했던 잡화점 풍경이다. 지금의 김한식 재활의학과 건물 옆에 있던 초가지붕의 상가였는데 월세가 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판은 내가 직접 써서 달았다.
두 번째 사진은 역시 70년대 지금의 시장오거리 부근에 있던 2층집의 세를 얻어 운영했던 맥주집 모습이다. 당진 최초의 호프집으로 일명 ‘삐어홀’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주요고객은 고산 미군기지에 와 있던 미군들과 카투사, 건달, 고위층 공무원들이었다. 맥주 한병에 28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지방일간지에 광고를 낼 만큼 신경을 썼던 가게였다. 장사도 무척 잘되어 아가씨를 4명이나 두고 장사를 했다. 아가씨들은 월급이 따로 없이 손님이 주는 팁을 받아 생활을 했는데 미군들의 씀씀이가 얼마나 컸는지 맥주값보다 팁이 더 많았다. 이 맥주집을 나는 부득이 정리해야했다. 아가씨들한테 랄랄라 춤을 배우는 큰애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사도 좋지만 아이교육이 내겐 더 중요했다.
세 번째 사진은 ‘삐어홀’의 내부모습이다. 교환이 연결해주던 수동식 전화기를 들고 있는 종업원의 모습과 축음기용 엘피판이 눈길을 끈다. 벽에 걸려있는 동그란 물건은 샹들리에로 반짝 반짝 불빛을 내던 조명기구다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