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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그림그리는 전신마비 청년화가와 수호천사인 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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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필(口筆)화가 박 정·임선숙 부부, 우강에

한때 국가대표 이을용과 구장 누비던 축구선수에서
몸을 잃은 대신 체감행복 100배 얻은 행복전도사

  전신마비라는 장애를 훌쩍 딛고 세상과 만나는 비밀의 문을 활짝 열어제낀 사람. 신(神)은 하나의 문을 닫을 때 다른 하나의 문을 반드시 열어놓는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구필화가 박 정(34세)씨와 그의 아내 임선숙(42세)씨가 우리 당진군에 터를 잡았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우강면 부장리 229-1번지. 임씨 오빠가 우강에 사는 덕에 이곳 당진에 오게된 부부. 세상에 빛과 위안을 던지는 화가로, 과연 당신들은 불행한가 질문하는 행복전도사로 끝없이 우리의 편견과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이들 부부를 만났다.

  2007년 1월 벽두. 부부의 작업실 겸 자택에는 여기저기 아내와 가족들의 손길이 살뜰하게 묻어있었고 박 정씨는 요사이 출판사의 의뢰로 자서전 쓰기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지난해 대구대학교 회화과를 정식으로 졸업해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올해 또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도전에 나선 것이다. 박씨의 자서전은 올 4월 세상에 나올 예정. 무슨 말을 덧붙인들 온몸으로 부대껴 이어온 삶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내게 그처럼 어려운 때도 있었구나 하고 박씨는 이제야 실감이 난단다. 한때 의사들마저 손을 놓아버렸던 시한부 생명에서, 휠체어로 세상을 누비는 21세기 예술인재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그의 길지않은 생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기적이라는 말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극적인 것이었다.   

  대한민국 축구명문인 강원도 강릉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 2학년에 다닐 때만 해도 박 정은 2006 독일월드컵 국가대표 이을용과 나란히 프로를 꿈꾸며 구장을 누비던 축구선수였다. 발목부상 입원 후 불어버린 몸을 다지기 위해 수영장에 갔던 1991년 바로 그날 그 시간, 다이빙대를 뛰어내려 수영장 바닥에 머리를 부딪던바로 그 순간, 목뼈부분 척추가 부러지며 물 속에 가라앉아 버렸던 박 정은 다시는 혼자 힘으로 물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일곱시간 예정했던 수술도 두시간만에 끝났고, 병실에 누워있던 4개월 동안 의사들은 생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은 듯 그의 곁을 말없이 지나다녔다. 그 사이 욕창과 방광염 등 합병증이 깊어갔고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또다른 수술이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병원에서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죽을 날을 받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후 6개월 동안 딱 세 번 하늘을 보았어요. 한 번은 방광이 막혀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가는데 그 밤하늘과 달과 별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다시 몇 개월 뒤에는 대낮에 응급실에 실려가는데 한낮의 빛이 얼마나 찬란하던지 눈을 못뜨겠더라구요. 그러고는 이사갈 때 또 한번 하늘을 보았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저는 신이 있다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살고 싶었어요. 죽음을 앞둔 운명 앞에서 말이에요.”

  박씨가 후에 아내가 된 임선숙씨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장애아동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였던 임씨는 교회 선교지에 실린 박씨에 관한 수필을 보고 물어물어 그의 집을 찾아가 보살펴 주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임씨는 박씨에게 청혼을 했고 박씨의 거센 만류에도 임씨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청혼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아내 임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집을 찾아갔는데 이 사람이 가족들 등떠밀어서 모두 일을 나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주먹쥔 채 마비된 손이며 겨드랑이 같은 데에 꼬인 개미들이 살을 뜯어먹어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속수무책인 거예요. 그걸 보고 얼마나 가슴이 메이던지 자연히 결혼을 결심하게 되더라구요.”

  그랬다. 박씨는 개미보다 약한 사람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어서 개미에게 살을 뜯겨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박씨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개미였다. 박씨는 길거리강연이나 대학특강 의뢰를 받을 때 가끔 이 일화를 소개한다. 개미에게 살을 뜯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 개미를 털어낼 손가락 힘이 있는 사람. 자기 발로 걸어나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 자기 손으로 먹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그의 강연을 듣고나면 모두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행복전도사다.

  하늘을 보며 비로소 살고 싶어졌다면 박씨는 그림을 그리며 삶의 기쁨을 다시 발견했다. 큰 사고로 장애를 얻은 미국의 어떤 미식축구선수가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누나로부터 전해들은 박씨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뛸 듯이 좋아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1993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95년에는 전시회에 출품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장벽이 놓여있었다. ‘그림 괜찮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자신의 경력과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보고는 냉담하게 표정이 바뀌었던 것이다.

  2002년 박씨는 수많은 대학문을 두드린 결과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시설이 가장 잘 되어있는 대구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아내와 함께한 대학생활은 학교측의 배려로 교원아파트를 무료임대해 살았을 만큼 많은 사람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 두시간도 앉아있기 힘든 상황에서 밤 10시까지 남들이 기울이는 몇배의 노력으로 초대형 졸업작품까지 자기 힘으로 완성할 만큼 박씨의 열정과 끈기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그 사이 아내는 비어있는 남편의 캔버스를 바라보며 날마다 생명의 색으로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호천사였다. 박씨는 1955년 「곰두리미술대전」특선, 2000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입선, 2002년 「아시아미술대전」예술상에 이어2005년 금강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고 2006년 2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제5회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 예술체육특기자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전시 경력도 50차례가 넘는다. 이미 각 신문과 방송이 박씨의 기적같은 삶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부부의 생활은 넉넉지 않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정도다. 그러나 박씨는 꼭 필요한 것 말고는 세상에 돌려주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아내 또한 이를 깎듯이 존중한다. 강연에서 얻은 소득은 반드시 따로 관리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 이렇게 살기로 약속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지못하는 어려움 역시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2007년 박씨부부는 두 개의 목표를 마주하고 있다. 올 4월이면 완성될 자서전과 4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아트서울전’에 부스 개인전을 여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임성실 지부장을 통해 당진미술협회에도 가입했다.

  박 정ㆍ임선숙씨 집에는 새로운 것 투성이다. 입에 물고 그려야 하는 남편을 위해 독특하게 재구성된 붓들, 아내가 직접 손으로 짠 캔버스. 처남이 만들어준 초대형 캔버스 이동기. 전동휠체어를 탄 채 입으로 타이핑해야 하므로 엄청나게 높아진 컴퓨터와 책상. 집 어귀에서부터 맨 안쪽까지 문턱이 없는 것까지. 게다가 이 집에 머물렀다 가면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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