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책소개
  • 입력 2008.01.14 00:00
  • 수정 2017.08.07 17:39
  • 호수 694

김순옥 당진문인협회원이 추천하는 <한중록>,<사도세자의 고백>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 들어 각 방송사에서는 역사드라마가 유행처럼 방송되고 있다. 모방송사에서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이산)에 대해 다시 재조명하고 있다. 작가에 따라 그 역사 인물이 달리 조명되지만 그동안 나에게는 죽은 사도세자에 대해 대변해주는 글을 자세히 읽어볼 기회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좥사도세자의 고백좦. 그제목이 눈에 들어와 서점에서 잡은 순간 다 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아버지인 영조는 사랑하는 자식을 왜 죽여야만 했는가?
사도세자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왜 죽임을 당했는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사도세자 그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한중록(閑中錄)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혜경궁의 통치가 맨 처음 이 책에 붙인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한중록(閑)’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혜경궁이 좥한중록좦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해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중록을 쓸 당시 혜경궁은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가 아니었다.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사도세자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 기구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혜경궁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이란 책이 없었다면 혜경궁이 한중록을  왜 그렇게 진실을 왜곡하며 썼을까 의구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노론의 세자빈 혜경궁은 남편보다는 친정 집안을 더 심중에 두지 않나 생각이 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어떤 부분에는 승자의 기록에 의해 역사학이 횡행했다. 진실이 왜곡되어 전해지기도 했으며 지난 역사이기에 그냥 무심히 묻힐 수도 있다.
240여년 전인 영조38년 (1762년) 윤5월21일 뒤주 속에 죽은 사도세자의 삶도 진실이 왜곡되어 삶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좥한중록좦에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했지만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으면 한중록에서 기록된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의 작품은 그 창작자나 해석자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는다.
한중록이 그랬듯이 사도세자의 고백도 우리가 읽고 역사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사도세자의 고백
지은이 이덕일 | 출판사 휴머니스트 | 가격 10,000원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