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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지역 명물을 찾아서 ② 정미면 사관리 ‘이안눌 신도비’ ] 조선의 ‘이태백’ 청백리 이안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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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눌 선생의 묘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7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대보름날 ‘다리밟기’로 맺어진 부부인연
때는 조선시대 중엽 휘영청 밝은 정월 대보름달이 청계천 냇가에 흐르던 날. 한 새신랑이 ‘다리밟기’에 나섰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 때 하인들이 몰려 와 새신랑을 업어다 색시가 있는 신방에 밀어 넣고 가버렸다. 한 이불 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신랑과 신부는 이튿날 서로 신랑, 신부가 바뀐 것을 알게 됐다. 남녀가 유별하던 그 시절, 하룻밤을 함께 보낸 신부는 신랑에게 과거에 급제하면 자신을 소실로라도 맞아달라며 간청을 한다. 그 후로 십여년이 흘러 새신랑이 스물아홉해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고 그날 일을 양가에 알렸다. 그동안 자식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색시 집에서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기뻐했고 둘은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새신랑은 훗날 조선의 ‘이태백’이라 불렸으며 예조판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 높은 벼슬에 올랐던 동악 이안눌 선생이다.
밭을 매는 노부부의 풍경이 한적한 마을 정미면 사관리에 이안눌 선생의 신도비와 묘가 위치해 있다. 마을에 사는 이 선생의 후손에 의하면 사관리 땅이 당시 선생이 임금에게 하사 받은 땅으로 풍수지리가 좋아 이곳에 묘를 두고 신도비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안눌 선생은 노후에 ‘동악시단’을 꾸미고 당대의 문장인 권필, 윤근수, 이호민 등과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신선같다며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일화가 전해지는 데 그중 하나가 두보의 시를 평생에 걸쳐 삼천 번 읽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그의 시에는 두보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

당대 최고의 문인이 잠든 곳 사관리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안눌(1571~1637) 선생은 당시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를 뽑는데 들었던 청백리 중 한 사람이었다고 문헌상 전해진다. 그는 특히 한시에 능해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 또한 잘 썼다고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그의 시를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문중 후손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는 선생의 묘가 사관리 야산 남향사면 구릉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의 주변은 송림으로 둘러 싸여 있다. 묘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신도비는 문중 후손들이 후대에 설치한 철책으로 보호되어 있다. 비문은 김상환이 짓고 당대 명필 송준기가 썼다고 기록돼 있다.
(사)내포문화연구원 홍석표 원장은 “이안눌 선생은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청백리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인물”이라며 “이런 분의 신도비와 묘가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런 분의 신도비가 비각이 없어 눈비를 맞으며 소실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안눌 선생의 후손 이원석 사관리장
“청렴했던 당대 최고의 문인”
이 안눌
선생의 14대 후손인 사관리장 이원석 씨는 신도비가 내다 보이는 곳에 살고 있다.
“높은 벼슬을 지냈던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후손들이 묘를 가꾸고 기리고 있어요.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는 철책이 낡아 앞으로 보수도 할 계획입니다.”
이원석 이장은 “이안눌 선생이 당대 유명한 시인이자 관리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진이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에 잠들어 있고 신도비도 위치해 있어 도지정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전했다.
그는 “예전에 묘가 건조하다는 풍수학자의 의견으로 묘 뒤에 방죽을 만들었다”며 “그 방죽을 지금은 확장해 농업용수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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