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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한진은 漢津이지 大津이 아니다 - 장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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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환 - 면천향교 전교

내포라는 지명은 역사적으로 고정되지 않았는데 후대로 갈수록 차령 서북부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확대 사용하고 있다. 원래 바다를 통한 관문 역할을 하던 大津(현 한진)을 통해 서울과 접촉했던 인근 고을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확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환의 택지리에는 차령산맥 이북 및 가야산 주변일대를 지칭하고 구체적 공간 범위로 영조 13년에는 18고을로 현재 평택에서부터 서천까지 이르는 지역을 지칭했으나 동왕 27년에는 10고을로 한정하였다고 내포문화권 공간적 범역설정기준에 충청내포 당국자가 위와 같이 기준하고 있다.
그러나 내포의 지명을 역사적으로 여러 문헌에 의해 범역을 살펴보면 서해 지방의 군현이 조정으로 세미운송을 해로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세미의 육지 운송은 우마차편으로 포구 근처 창으로 집적 하였다가 배편을 이용해 서해를 거쳐 한강을 타고 한성의 마포, 서강의 창으로 운송하던 것이 그 당시의 운송수단이었다.
면양읍지의 산천조에는 범근내포가 있는데 범근내포의 지리적 위치를 자세히 기록했다. “범근내포는 군 동쪽 30리에 있고 창고가 있어 정부에 공납하는 홍주 소영 군현의 세미를 경성으로 조운하다가 성화 14년 봄에 바닷물이 얕아져 배밑이 땅에 닿아 아산 공제곶으로 조운포를 옮겼다”고 기록돼 있다.
이병연의 조선환여승타람에도 “부리포 일운 범근 내포 군동쪽 27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부리포는 신벌포라고 하는데 부촌의 포구 또는 부리처럼 쑥 나와 있다고 해써 부리포라고 했다. 신벌포는 新의 음이 변해 새발포, 사발포로 불렀다. 범근내포를 새발포로 부른 것이 향토사적으로 증명된다. 내포는 원래 범근 내포라고 했는데 홍주소령 10개 군 현 세미의 수조처가 있었는데 한성으로 조운하던 포구로 현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가 여러 문헌의 고증상 확실하다. 강문은 범근천 현 삽교천 강 안마을로 옛 면양읍지 방리조에도 면천군 범천면 강문리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우강 합덕 평야를 소들 강문 평야라고 하며 소들 강문 평야는 우리나라 삼대 평야 중 한곳이다. 내포는 대동여지전도에 현 삽교천 서안이라고 표기해 이곳을 대진 현 한진포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추정이다.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접역지도는 모두 조선 후기의 지도임을 알아야 한다. 범근 내포 즉 내포는 조선초기의 포구명이다.
옛 당진현에 당진포가 있어 당나라와  백제에서 문화교류를 했으며 면천에 한진포가 있어 당나라와 문화교류를 한 실크로드가 있어 역사상으로 증명된다. 한진은 예부터 漢津으로 표기했지 大津으로 표기한 사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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